[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48)

2016-10-03     경남일보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48)

어찌된 일인지 언니의 비명 한 오라기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얼마 만에 땀투성이가 되어서 나온 아버지는 앞가슴이 풀어헤쳐진 옷을 펄럭거리며 온 집안을 뒤지고 다녔다. 오래지 않아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건넌방 천장 위에서 돌돌 말린 삼베 무명베 몇 필이 아버지가 천장을 뜯는 순간 방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다음으로 달려가서 열어 본 뒤꼍의 빈 장독 속에는 메주덩이와 누룩 짝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 행랑채에 딸린 더그매 위에서는 날개와 주둥이를 소리 못 내게 묶은 닭 여러 마리가 실신한 채 덮여 있었다.

그 뿐 아니었다. 대밭 귀퉁이에 있는 약초밭을 파헤치자 묘지의 부장품 마냥 옷이며 장신구 학용품 라디오 건전지 등의 각종 물건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쾌남은 그제야 겨우 아버지가 왜 제 옷을 찢어 발겼는지 어렴풋 짐작이 됐다.

“쾌남아 니는 우짜든지 열심히 공부만 해라. 니 공부는 내가 시킬 끼다. 앞으로는 여자도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 교복 입고 책가방 들고 고등학교 대학교 댕기모 올매나 멋지고 좋노”

언니는 입학한지 얼마 안 된 양지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런 약속을 했다. 이런 맛에 재미를 붙인 양지는 걸핏하면 학교 가기 싫다고 꾀를 부렸고 그럴 때마다 언니는 예쁜 옷이며 연필 깎기, 필통, 부잣집 아이들도 갖기 어려운 동화책, 살결이 매끄러운 분홍색의 귀여운 인형 등을 안겨 주며 빼먹지 말고 학교를 잘 다니면 뭐든 네가 원하는 건 다해준다고 달랬다.

“언니는 어데서 이런 걸 갖고 왔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물으면 언니는 입술에 가만히 손가락을 대고 어른들 방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 뒤 살짝 머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일 삯 모아서 샀제”

그 무렵 마을 어른들이 하나 둘만 모이면 소곤소곤 주고받던 말을 듣기는 했다.

“참, 큰일이네. 정순 네는 장 담을라꼬 깨끗이 씻어 놓은 메주가 감쪽겉이 없어졌단다”

“아이고 말도 마라, 저 건네 자동댁네는 서로 베 짜 놓은 것 몰래 팔아 묵고 거짓말한다꼬 고부간에 서로 엎어삶고 대강이 노름이 나고 난리가 났단다. 바랜다꼬 개울둑에 널어놓은 베가 온데 간데 없어졌다 안 카나. 우리 알기로 그 집 고부간 모두 다 눈 기시고 그럴 사람들이 아이거등”

“고무도둑이 생긴 기다. 이랄 기 아이고 순경을 불러다가 집집마다 춰 보던지 해야지 맘을 놓고 살수가 있나. 이전 겉이 인민군이 있어서 밤 도둑질 해간 것도 아닐 낀대”

“그래 이거는 큰 도둑도 아니고 고무도둑인데 너므 동네 부끄러바서 말도 할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