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0)

2016-10-03     경남일보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0)

성남이가 없다는 말, 그것은 곧 너희들은 맞수가 안 된다는 뜻 아닌가. 막상 그런 선언을 듣게 되자 양지는 다시 허를 찔린 듯 궁색스러움에 젖었다. 목이 메도록 억울했다.

“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꽁하지 않으니까 말하기는 좋아.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무지하게 기쁘다. 식당 사람들한테 두 배나 계약금을 물어줬지만 우리는 한숨도 잠을 못 잤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모르겠다며 엄마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도 부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보고는 눈물을 닦았어. 엄연한 자손이면서 드난꾼 하님처럼 허드렛일만 거들면서도 그렇게 기를 쓰고 여기를 드나들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이 되살아 난 거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족보 구경도 못하고 집과 함께 그렇게 된 게 안타깝기도 하고… . 너그 엄니가 마지막 날 울 엄니가 찾아갔을 때 챙겨 놓을 텐께 찾아 가라꼬 하더란다.”

“족보?”

양지는 일부러 명자언니를 똑바로 쳐다보며 휩뜬 웃음을 웃어 보였다. 비록 명자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겐가 한 번은 꼭 해야겠든 말이 있었다.

“족보는 엄마가 따로 챙겨내 놓았는데 내가 태워버렸어.”

“뭐라꼬? 이 가시나가!”

돌연 팔을 뻗은 명자가 양지의 가슴을 힘껏 쳐서 떠밀었다.

놀라움과 함께 잠재 된 아쉬움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양지는 엉덩방아를 찧고 나둥그러진 자리에서 약 올리는 하얀 웃음을 지으며 명자를 치떠 보았다.

“까짓것 아무 것도 아니야. 꼭 필요하면 하나 사던지.”

“와 그리 암창시런 짓을 했노. 인제 보니 무섭고 독한 년이다. 조상의 영이 실린 걸, 가슴도 안 떨리더니. 암시랑토 안했어? 세상에 어쩜 그리 천벌 받을 짓을 했을꼬.”

상대방이 안타까워하는 만큼 고소할 줄 알았다. 바로 어젯저녁에 태워버렸다면 반응은 더 격렬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한 무더기의 인화물로 불속에서 재가 될 때의 족보를 지켜보던 그 순간의 야릇한 치기는 이미 담담함으로 변해 있었다.

“그 더럽고 가혹한 편애, 남존여비 사상. 명자언니네 집도, 또 우리 언니가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잘 알잖아. 그렇게 아쉽다면 돈 주고 하나 사”

“그게 어디 서점에서 사는 거냐?”

그걸 모를까봐. 양지는 웃어보였다.

“내가 아는 선배네 아버지는 자기가 종중 일을 책임지고 하면서 자기네 부모가 서자{庶子}라는 걸 족보에서 싹 지워버리고 다시 했다더라.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어? 족장이 인구관리를 위해 만들었던 편의 장부일 뿐 여자들의 결백과 순수 아니면 그야말로 핏줄이 아무 것도 증명 안 되는 허상의 기록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