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7)

2016-10-03     경남일보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7)

“누님도 바쁘실 텐데-”

의례적인 답변이지만 무슨 말이든 하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당분간이긴 하지만 어른도 힘들 것이고 어른들 눈치 보느라 어린 게 더 힘들겠지”

오빠도 끼어들어서 말을 거들었다.

“저, 그 사람과 헤어질 깁니더. 직장도 사표 냈고요”

호남의 말과는 상반된 선고였다. 양지는 긴장한 채 꼬나 잡고 있던 끈이 드디어 제대로 수축된 감을 받았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양지도 고종오빠도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을 수용할 듯한 주영아빠의 부드러운 미소와 상냥함 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흔들고 해체시키지 못할 부동의 단단함이 숨겨져 있다. 양지는 분노가 이는 눈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주영아빠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너도 인정하는 실수이면서 모두가 인정하는 그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아내를 버리겠다는 거냐!’

엄격히 말하면 저 남자가 없다고 혼자 못살 호남도 아니건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호남이 내침을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양지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꺼내는 주영아빠의 말은 저대로 일리가 있었다.

“동네사람들 부끄럽다거나 뭐 그런 건 절대 아닙니더. 그 사람 말대로 고의가 아니라 실수라 카는 걸 다 인정한다 캐도 인제는 제가 도저히 같이 몬 살겠습니다. 내가 깨지고 뿌사지는 거는 얼마든지 맞차 가면서 나만 쪼끔만 참으면 된다 싶었지요. 그렇지만 뭘, 무엇을 위해서 왜 그래야 되는지 이제 그 이유가 없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의 모든 계기는 사내자석인 내가 너무 비열했기 때문에 불러온 비극일 수도 있지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남보다 집이 크모 뭐합니꺼. 살림살이가 잘 갖차져 있고 잘 먹고 잘 입으모 뭐합니꺼. 호남이한테 너무 많은 걸 이임하고, 아니 솔직히 기대를 했다는 게 맞겠지요. 사내자석이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한테 잡혀 사느냐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리가 잘살게 되면 누가 주도권을 잡든 그게 무슨 흉거리가 되느냐고 저는 일소에 붙였었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내의 능력을 부추겨 가며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 했던 비겁자에게 천벌이 내린 기라꼬 볼 수도 있것지예. 지금이라도 저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는 생각이 든깁니더. 앞으로 혼자 살낍니더. 걱정 없십니더. 밥은 전기밥솥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해줍니더.”

말을 마친 그는 상대방이 어떻게 인정하든 말든 상관 않겠다는 듯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 화장실을 묻더니 일어섰다.

이게 아니다. 우리들이 가꾸어 온 내일은 정말 이런 게 아니었다. 너무도 황망한 나머지 놓쳐서 안 되는 사람을 잡을 듯이 주영아빠를 따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양지는 가까스로 앞에 있는 고종오빠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울음이라도 쏟아질 듯 목소리가 떨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