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8 (311)

2016-11-29     경남일보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8 (311)

‘자네들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바른 말하면 아버지가 양자들인 거 아니냐. 이왕 이렇게 된 것 핏줄이 기고 아니고를 따지지 말고. 산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돼 있으니 너무 염려 말고 지나보자’

호남이랑 오빠랑 다투듯이 했던 말이었다. 물론 오빠는 다른 사람도 돕는데 외삼촌을 못 도울 거냐고 했으니 양지가 꼭 나설 필요도 없고 앞으로도 부담 가지지 않게 오빠의 형편이면 대책도 강구해 줄 것이다. 오빠는 마치 전개될 앞으로의 일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항상 걱정 없이 태연하게 나온다.

마음이 한가해야 한가함을 느낄 수 있지 몸이 아무리 한가해도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면 앉아있는 자리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다. 또 한 잔의 엽차를 받아 놓고 양지는 일부러 의자에다 깊이 등을 기댔다. 마음은 분주했다. 그러나 지금 할 일은 없다

그녀는 편치 않은 마음을 무표정한 얼굴로 감추고 있다. 검은 포장을 친 듯 어두운 망막으로 떠오르는 며칠 전 호남을 따라 갔다가 보았던 일들도 그랬다.

“동구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마을에서 나 때문에 회의를 한 대. 모르고 그냥 온 것처럼 와보라는데, 지들이 무슨 권리로 남을 이래라 저래라 해”

호남은 미리부터 씨근덕거리며 불편부당한 심사를 드러냈다. 양지는 그 돈키호테 같은 성질로 어떤 불상사를 야기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호남을 혼자 보낼 수 없었다. 호남은 불미스러운 꼬락서니를 언니한테까지 보여주기는 싫으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적지로 동생이 간다는 것을 안 이상 혼자 보내놓고 기다릴 수 없어 우겼다.

“내가 몰매라도 맞을까봐서? 천만에다. 태권도 3단, 이 최호남이를 뭘로 보고. 내가 그리 허튼 줄 알고 덤비다간 큰 코 다치지. 걱정 말고 잠이나 고이자고 있어라 그만”

“널 그런데 보내놓고 내가 어떻게 고이 잠을 잘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아무 말 않고 그저 보고만 있을 게. 동구 밖에서부터 따로 떨어지면 안 되나”

그런 다짐을 받고서야 호남이도 그녀의 동행을 묵인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고 단 몇 개 월 만에 집이 이렇게 황폐해질 수 있는가. 잠겨있는 현관 앞에는 쓰레기가 쌓여있고 어수선한 집안에는 냉기만 가득했다. 잠긴 문을 열려고 승강이 하던 중에 호남이는 마을회관으로 불려가고 양지만 혼자 남았다.

들려오는 소문이나 다가오는 모난 시선들을 호남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을회관까지 동행하려 했으나 혼자 가야한다며, 걱정 말라며 우기던 호남은 여전히 씩씩한 걸음으로 대문을 벗어났다.

호남에게는 그냥 집에 있으마고 했지만 양지는 이내 박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호남을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