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추억
조세윤(사)경남문화관광해설사 회장)

2017-04-18     경남일보

내 친구 중에 유난히 바닷가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바닷가에만 서면 어릴 때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고 한다. 이 친구가 중학교 3학년을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뱃속에는 동생이 자라고 있었단다. 달이 차서 동생을 낳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친구는 바래(해산물 캐는 것)를 가야했다. 자기 키보다 두 배는 넘는 대나무 장대와 그물 보자기를 들고 갯가로 내려갔다. 훌훌 옷을 벗어 한쪽에 뭉쳐두고 대나무 장대를 들고 목 아래까지 차오른 물속을 걸어다니면서 발끝으로 갯벌 바닥을 더듬어 느낌이 오면 장대를 그 위치에다 냅다 찌르고 장대를 따라 물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그리고 맨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파면 주먹보다 큰 피고막이 잡혀 올라온다.

몸둥이와 다리는 잘피에 쓸리고 닿아서 몹시 따갑다. 그래도 한참을 더듬고 다니면서 파 올린 피고막이 벌써 그물망에 한가득 찬다. 이만큼이면 엄마 삶아드리고도 남겠구나 하며 그물 망태를 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저기 앞에서 동네 아저씨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 “내 문어야!” 문어 한마리가 밀물 따라 바다 깊은 곳에서 갯가로 밀려온다. 그런 문어는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아저씨는 그 문어를 친구에게 주었다. 친구는 집으로 달려와서 문어와 피고막을 삶아 어머니께 드렸다.

친구는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고 그 갯가에서 바래질을 했다. 어머니와 갓난 여동생을 돌보느라 며칠 동안을 죽어라 바래질만 했단다. 이 갯가의 뻘 바닥이 친구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먹여 살렸다. 친구는 이 갯가를 잊지 못한다. 누군들 이런 추억이 스며있는 곳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친구의 어머니도 고인이 되시고 여동생도 도시로 시집을 가서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단다.

여동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오면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조카들을 데리고 이곳에 한번 와 보고 싶다고 하면서도 너무 변해버린 이곳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난감해서 망설여진다고 한다. 넉넉하고 풍성했던 갯벌이 있던 그곳이 어느 재일교포의 집념으로 메워지더니 버려진 곳이 되고, 쓰레기매립장이 되고, 폐수처리장이 되면서 친구의 추억을 앗아가 버렸다. 요즘에는 그곳에 발전소를 짓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긴 이제는 문어도 오지 않고 피고막도 없다. 정강이를 피가 맺히도록 할퀴던 진지래기도 없다.

조세윤(사)경남문화관광해설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