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속의 검
이홍식(수필가)

2017-08-07     경남일보

나는 답답할 때면 시집을 읽는다. 어제도 시집을 읽다 좋은 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집을 지키고 있는 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며 끝내 태산을 울게 한다는 이치를 터득한 사람만이 검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는 검이 필요 없다. 그래도 검을 앞에 놓고 부드러운 덕을 기르며 살아야 하는 것은 함부로 검을 뽑아 허명을 날리지 않기 위함이다.” -최동호 시인의 ‘명검’-이란 시의 한 부분이다.

시에서 말하는 검劍이란 해석에 따라 사람이하는 말일수도 있고 문인과 학자가 쓰는 글도 될 수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아니면 돈과 권력이나 세상 힘 있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어떤 것들의 도구를 일컫는 것도 될 것이다. 야쿠자의 검이든 이순신장군의 검이든 검이란 함부로 칼집에서 빼어드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칼을 빼는 일이 있더라도 아무 곳에서나, 아무데나, 아무에게나, 휘두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과 관계를 가지다보면 간혹 어떤 사람은 작은 주머니칼도 검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본인이 그것을 검이라 여기면 어쩔 수는 없겠지만, 마치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돈키호테의 모습에서는 어떤 정의감 같은 것이라도 찾을 수 있겠지만, 주머니칼을 검이라 여기며 휘두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결단의 순간이 있어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면 빼어든 칼로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상대를 베지도 못할 거면서 그것을 검이라 내보이고 싶은 것은 어떤 정의감이나 자기 지킴보다도 자기과시거나 아니면 자랑이 대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에게는 검다운 검도 없다.

힘이 없으면서 힘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힘이라고 했는데, 행여 나도 그 모습은 아닌지 냉정한 마음으로 내가 남의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가장 강력한 자기성찰의 과정은 남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 혹시라도 내가 검답지 않은 것을 검으로 여기고 남에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러는 일이 더러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쓰는 글이 되었든, 아니면 급한 성격으로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든. 만약 그렇다면 최동호 시인의 ‘명검’이라는 시를 수없이 가슴으로 새기며 읽어야 한다.

 

이홍식(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