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다시 보기
강경주(시조시인)

2017-08-07     경남일보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다. 역사의 해석은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고 그것은 미래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의 몽진을 마구 비난하지만, 만약에 그가 몽진하지 않고 한양을 고수하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순신 장군인들 끝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패한 인조에게서 엿볼 수 있다. 청나라 군에 항복, 군신의 의를 맺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느라 이마에 피를 흘려야 했던 삼전도의 굴욕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한양 사수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몽진하지 않고 한양 사수를 고집하다가 왕이 적에게 사로잡히거나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전제왕조 국가였던 조선의 입장에선 패망한 것과 다름없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역사상 몽진을 떠난 임금도 비단 선조 임금뿐만은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 중에도 있었고, 거란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도망간 고려 현종, 몽골과의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옮겨간 최우 무신 정권,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내려간 공민왕, 청나라의 침략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 고종의 아관파천, 6·25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의 부산 피신 등 부지기수이다.

선조의 몽진은 오히려 왜군의 전쟁 라인(Line)을 길게 늘어지게 만들고 시간을 끌어 보급과 병력이동의 약점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이순신 장군의 항전이 효과적일 수 있도록 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나마 처음에는 반대했던 문무백관들도,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참패하자 모두들 몽진을 주장하였으며, 심지어 ‘징비록’을 쓴 유성룡까지도 찬성하였다. 선조가 제 맘대로 몽진했던 것이 아니다.

선조는 의주로 도망간 후, 광해군을 급히 세자로 책봉했다. 그동안 신하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했지만 거절하였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지자,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내렸다. 이조차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선조는 광해군과 따로 행동하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의 몽진을 덮어놓고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왕이 곧 국가이고, 국가가 곧 왕이었던 시대의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몽진을 한 행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전란이 터졌어도 제 때 막아낼 힘을 처음부터 갖출 수 있도록 힘썼어야 했다.


 

강경주(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