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 숭정 기원후 107년
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2017-09-06     경남일보
도로 옆 누에고치 모양의 자연석에 玉洞마을(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이라 새겼다. 玉은 세 개의 구슬을 끈에 꿴 모양을 본 딴 글자에서 王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점을 찍었다니 귀한 사람과 연관이 있는 마을이구나.

옥동교를 건너자 안내판이 있다. 우로 가면 세종대왕 태실지 바로가면 단종 태실지이다. 4리 이내에 할아버지와 손자의 태실지가 있는 것이다. 세종의 태실을 조성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볼 수 있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25일에 태실증고사 정이오(鄭以吾)가 진양으로부터 와서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치니, 그 산은 진주의 속현 곤명(昆明)에 있는 것이었다.

먼저 세종대왕 태실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완사천을 따라 태봉산(당시 소용산) 굽이를 도니 기슭에 경사지를 절개하여 다지고 철재 울타리를 둘렀는데 그 위로 비두가 보인다. 계단을 오르자 가운데에 비석이 있고 돌난간, 닌간지대석 등 석물을 진열하였다.

거북을 기단으로 비를 안치하였는데 비면과 거북에 버짐 자국이 널려있다. 앞면에 世宗大王胎室(세종대왕태실)이라 새겼다. 뒷면은 崇禎紀元後一百七年甲寅九月初五日建(숭정기원후일백칠년갑인구월초오일건)으로 건립 시기를 새겼는데 숭정은 누구이며 ‘숭정 기원후 107년’을 어떻게 계산할까.

숭정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이며 연호는 숭정, 묘호는 의종이다. 1611년 태어나 1627년에서 1644년까지 재위하였다.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 북경이 포위되자 조회를 열었으나 아무도 참석치 않는다. 최후를 예감한 그는 환관에게 의관을 벗겨 얼굴을 가리게 하고 회나무에 목을 매 생을 마감하였다.

기원(紀元)은 연호의 연수를 기산하는 첫해, 기원후 107년은 의종이 황제에 등극한 1627년에 107년을 더하여 1734년이다.

이런 연산을 하게 된 근거는 조선왕조실록 영조 10년(1734)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곤양군의 두 태실의 표석은 이번에 처음 새로 세우는 것이니만큼, 뒷면에는 마땅히 숭정 기원후 몇 년 간지, 몇 월 며칠이라고 써서 새겨야 될 듯하고….’이다

1734년은 역사의 무대에 명이 사라진지 90년만이고 청나라가 전성기를 누리던 옹정제 12년이다. 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며 중국사에서 제갈량과 쌍벽을 이루는 일중독자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조선은 영조 10년이다.

일제가 1929년에 조선 왕조의 정기를 끊고자 전국에 산재된 태를 경기도 양주로 옮기고 태실이 속한 땅을 민가에 불하한다. 세종의 태실도 예외가 아니라 그 자리에 이씨가 아닌 시신이 묻혀 있다.

비석에 버짐 모양의 자국은 땅속에 묻힌 석물을 탐침으로 찾는 과정에서 생긴 생채기이다. 흠집 부분을 시멘으로 메우고 산 아래로 옮겨 복원하였다.

세종대왕 태실비문에 숭정 기원후 107년을 사용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