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94)

2017-09-19     경남일보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94)

붙박이처럼 서서 여물을 새기는 녀석의 초연한 자세는 일희일비하고 갈팡질팡하는 양지 자신을 흉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 입은 피붙이를 상식으로만 대하고 있는 양지 자신에게 좀 느리더라도 너그럽고 더 따뜻해질 수 없느냐고 무언의 가르침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면 훈풍도 시리고 쓸쓸한 법이다. 귀남이 역시 그리워서 찾아왔던 피붙이들에 대한 기대감이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귀남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니 이해하기 보다는 너무 원칙과 상식으로만 귀남을 대하고 몰아 붙였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저번처럼 또 어딘가 돌 틈에 불쌍한 꼬락서니로 쭈그려 앉아서 눈물이라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양지는 산비탈을 돌아갔다.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면 어떨까. 아이를 업고 도망치듯 무작정 뛰었다. 벌겋게 저녁놀이 하늘을 물들였더라. 이 어미 가슴을 물들인 피멍처럼 온 하늘이 그렇게 내려 보는 곳으로 죽을 둥 살 둥 지황 없이 달음질치는데 에미 속을 모르는 그 아가는 그저 전에 없이 업어주는 에미가 웬일인지 셈해 볼 이견도 없이 등에서, 그저 즐거워서, 벌떡벌떡 날개춤을 추더라. 에미가 죄가 많아서 낳은 자식 건사도 못하고, 나는 아마 죽어도 저승에도 못 들어갈 거다. 끝까지 매단지게 자식을 감싸안지 못했던 자책에 빠져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눈물로 들이켰던 어머니. 그러나 좋은 집에서 저나 잘 살게 보내야지. 했던 아직 못 했던 그 말을 전한 들 무슨 감동으로 귀남의 전철을 뒤돌릴 수 있을런가.

귀남은 바람에 날려 주저앉은 비닐봉지처럼 허우룩한 자세로 언덕에 누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들리던 선율은 다가갈수록 점점 또렷해졌다. 한숨처럼 시작된 노래는 늘 한과 열정을 실은 가락으로 음률이 탱탱해졌다. 양지는 소리 나지 않게 발을 멈추고 귀남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던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노래를 끝낸 귀남은 손에 집히는 대로 돌을 들어 아무데나 던지기 시작했다. 흘러 간 대중가요지만 귀남이 목 놓아 부르는 노랫말의 의미는 바로 그녀 자신의 애절한 심정을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 취한 취객이 이국의 하늘 밑을 떠돌면서 흥얼거리는 것을 너무나 제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노랫말에 반해서 어린 귀남의 청각은 뼛속 깊이 새겨 넣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