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줄 통로 자리
황광지(수필가)

2018-01-23     경남일보
세 번째 줄 D석, 즉 통로 쪽 좌석에 앉게 되었을 때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외여행을 다녀도 비행기에서 이런 명당을 차지하긴 처음이었다. 일행들의 부러움을 샀다.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길이니 갈 때보다는 1시간30분가량 줄었다고는 하지만 12시간을 보내야 되는 거리다. 화장실 출입이 자유로운 통로 쪽이야말로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헤드폰을 착용하고 앞 모니터에서 목록을 찾는 중에 불상사가 생겼다. 스페인으로 갈 때 네 편의 영화를 봤는데, 취향에 맞지 않아도 서너 편은 봐야 하겠지? 이러한 시간 보낼 궁리가 무색하게 아예 작동이 되지 않았다. 승무원을 불러 알렸더니 곧 손을 보겠다고 했다. 기내 허브센터에서 무슨 조치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12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또 운행정보도 간간이 확인하려면 화장실 옆으로라도 옮겨야 하나?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승무원은 죄송해서 조아리고…, 그때 문득 어찌할 바가 번쩍 떠올랐다. 그래, 글을 쓰자. 그냥 글을 쓰겠으니 메모지를 달라고 했다. 승무원은 내 해결책에 고마워하며 메모지를 구하러 갔다. 그 사이 객실 내 책임자라며 남승무원이 찾아와 내 옆에 무릎을 꿇다시피 자세를 낮춰앉아 사과했다. 오히려 미안했다. 여승무원은 A4이면지를 여러 장 가져왔다. 나는 집에 가서 하려고 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막다른 골목이라고나 할까.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니 글이 써졌다. 옆의 젊은 남녀는 몸을 서로 기대고도 각각의 화면으로 즐기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 나는 신기하게 글이 잘도 쓰였다.

세 번째 줄 통로 자리라고 흠뻑 빠졌다가 김샜던 시간은 점점 사라졌다. 다른 뿌듯함으로 가슴이 출렁거렸다. 스페인으로 떠날 때 13시간30분 동안 영화 네 편과도 어차피 사투를 벌였다.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보는 것도 머리가 불편하고 주리가 틀렸다. 오히려 머리는 편하고 등받이에 기대기도 편했다. 기내 천정에서 내려오는 작은 전구에서 충분한 빛을 쏟았다. 이렇게 집중해서 오래 글을 써 본 적이 있었던가. 어깨와 등이 당기면 등받이에 몸을 잠깐씩 붙였다. 승무원들은 자주 나를 살폈고, 계속 깨어있는 내게 커피를 가져다주는 바람에 잠은 사라졌다. A4이면지 8장을 볼펜으로 채웠다. 용지를 더 부탁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10시간가량 글을 썼다. 남은 2시간쯤이야. 승무원들은 마지막 기내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 번째 줄 통로 자리, 분명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