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단]나팔꽃 씨(정병근)

2018-02-04     경남일보
[경일시단]나팔꽃 씨(정병근)


녹슨 쇠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 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속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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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스스로 만들고 가는 곳이 길이 되었다. 생존은 억척스러웠으며
가팔라서 늘 숨은 가빴다, 더 높은 곳을 향하는 매듭의 중간마다
함성의 나팔은 존재를 알렸고. 그 생의 기록은 유전인자로 남아서 부활을 예비한다.
어제가 입춘이다. 씨앗들의 눈이 밝아 온다. 봄이 제대로 시끄러울 것 같다. (주강홍 진주예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