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기라도 운전해서 다녀올까?

2018-04-12     경남일보
“남쪽에는 요즘 꽃이 한창일 텐데, 경운기라도 운전해서 느그 엄마 데리고 다녀올까?” 가끔 친정에 들르는 살가운 딸에게, 여든넷 아버지가 슬쩍 한 마디 흘리셨다. 강원도에서 줄곧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는 한 살 연상의 아내를 위해 봄나들이를 기획한 것이다.

‘경운기라도 운전해서’ 은유를 담아 건네는 아버지의 협박은 봄꽃보다 더한 유혹이었다. 천리 길 남녘으로 경운기를 운전해서 꽃 보러 가시겠다는 익살스런 엄포는, 너희들과 하룻밤 보내고 싶구나, 자식들에게 보내는 지독한 구애였을까. 아버지 마음을 아는 자식들은 일정을 비우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번잡한 게 싫어 평일을 택한 여정. 아홉 식구가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통영과 남해를 거쳐 우리 집에 오셨다. “짐 푸시고 오셔서 차 한 잔 하세요”

시설 좋은 펜션이 아니라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족을 불렀다. ‘달빛다방’이라 부르는 차실은 열 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지만, 처음 만나는 서먹함을 없애기에 참 좋은 곳이다.

찻잔에 이야기를 담아 두어 시간 보낸 탓에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 멋쟁이시죠?” 막내따님이 물었다. 대답 대신 빙긋 웃는 내게, 여행을 떠나게 된 동기를 이야기 해주었다. 부모 자식 사이가 이렇듯 허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팔십 평생을 농부로 살면서도, 익살스런 엄포 한 마디로 자식들 불러 모을 수 있는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버지의 구애 언어를 알아차리고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식들 마음은 또 얼마나 맑을까. 부러운 시간이었다. 방으로 돌아간 그들은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가족의 신발만 고단했던 여정을 떠올리며 쉬고 있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가는 비가 내렸고 안개도 자욱이 끼었다. 무릎 약한 어머니 부축하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르신의 입가에서, 모과 꽃 닮은 웃음을 보았다. 톡톡 터지는 요란스런 벚꽃이 지고나면, 잎부터 피워 올린 뒤 숨어서 피는 꽃이 모과 꽃이다. 어머니를 번갈아 부축하는 자식들 바라보는 어르신의 눈빛은, 또 얼마나 따스해 보이던지.

부부란, 박준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도는’ 연민으로 사는 것일까. ‘경운기라도 운전해서’. 평생을 농사짓느라 허리 굽은 아내를 위해 던진 어르신의 지독한 은유 한 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을 것 같은 봄날이다.

공상균(농업인·이야기를 파는 점빵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