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의 도시 진주

강신(명상지도사)

2018-11-07     경남일보

진주성대첩에 대한 경남일보의 특별기획기사를 보면서 다시 진주를 생각해본다. 하륜대감은 ‘봉명루기(鳳鳴樓記)’에서 진주시의 형상을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고 하였다.

진주의 주산인 비봉산은 봉황이 양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를 듯 한 형국으로 동쪽 날개는 말티고개를 지나 선학산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두고개와 당산재로 뻗어있다.

봉황은 우는 소리가 퉁소를 부는 소리와 같고, 살아 있는 벌레를 먹지 않으며, 살아 있는 풀을 뜯지 않고, 무리 지어 머물지 않으며, 난잡하게 날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아무리 배고파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이런 수호신과 같은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곳곳에 비보를 설치했는데, 강경책으로 비봉산 남쪽에는 그물을 쳤다는 뜻의 망진산(網鎭山), 까치를 보면 날지 않는다는 전설에 따라 들판 이름을 까치 작자를 써서 작평(鵲坪), 대롱사와 소롱사는 새장을 뜻하는 롱(籠)자를 붙여 봉황을 가두어 두려고 했다. 또한 유화책으로 봉황을 먹이로 유인하기 위해 대나무를 심고 놀이터로 오동나무를 심었다. 남강을 따라 대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비봉산은 진주 강(姜)씨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비봉산은 본래 대봉산(大鳳山)이었으며 그 아래 봉곡촌(상봉동)에는 강 씨들만 집단으로 살았다. 고려시대 강 씨들이 정부 요직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세도가 대단하였다.

광조때 영상서문하도성사를 지낸 강구만의 집 뒤 봉바위(鳳岩)를 보고 강남도사가 “강 씨들의 대성함이 이 바위로 인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이후 고려 현종때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강홍의 시대에 형제 열한사람이 경상(卿相·삼정승과 육판서)으로 한나라의 정권을 한 문중에서 장악하자 이를 시기한 자가 임금에게 거짓을 고해 몰래 봉바위를 부수니 새빨간 피가 흘렀다고 한다. 고려 인종은 척준경의 모함에 속아 강홍 형제들을 반역죄로 내치고 근거지인 대봉산을 봉황을 날려 보낸다는 뜻의 비봉산으로, 봉지는 봉을 삶는다는 부지(가마못)로 고쳤다.

조선 중엽 도승이 지나다가 봉황새는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라는 충고에 후손들이 상봉서동에 봉란대를 만들었다. 산이 푸르고 물이 수려한 봉황의 도시 진주에 걸맞게 이제는 대봉산의 본래 이름을 찾아주는 시도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강신(명상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