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새해 맞이하소서

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

2018-12-30     경남일보

노을 너머 아득히 겨울새 서너 마리 날고 있다. 그도 잠시, 이윽고 그 울음소리 구름 속에 끊어진다. 빛 다한 해가 영원의 함지(咸池)로 침잠하고 어둠이 하늘을 덮는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자동차 불빛은 긴 띠를 이룬다. 사람도 새도 모두 제 깃들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묵은 달력을 내려야 할 시각이다.

연시매최(年矢每催) -세월은 화살 같아 매양 재촉하는구나- 천자문 구절만큼이나 삭연한 무술년 끝날이다. 지난 한 해가 뇌리에 명경 같다. 날마다 뜨고 지고, 찼다가 이지러지기를 반복한 해와 달이건만 사람의 세월은 되돌지 않는다. 앞만 보고 달려온 열두 달에 채운 건 무엇이며 무엇을 비웠던가. 채워야 할 것은 하나도 채우지 못한 채 종내 비워야 할 것만 붙들고 있지는 않았는가. 어둑발 내리는 공제선을 바라보며 쓸쓸히 회상에 젖는다.

한 해를 돌아보는 소회는 누구에게나 ‘허전’ 두 음절로 수렴되게 마련이다. 지나간 일 년 동안 아무것도 채운 것이 없어서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채워온 것 때문에 끝날이 더 허망할지도 모른다. 아등바등 채운다고 채운 것들이 부질없는 헛것일 뿐이란 게 어김없는 세모의 정서다. 하지만 해넘이 시각에 엄습해오는 회한에 한없이 매몰될 일은 아니다. 내일 또 다시 새해가 머리 위를 비출 것임을 잘 알지 않는가.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임중도원(任重道遠)을 정했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부디 짐 내리지 말고 끝까지 가라’는 뜻에서 제안했다고 한다. 어제오늘 정치 사회적 함의 말고 우리네 개인 삶에 갖다 대어도 새길 만한 말이 아닐까 싶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한다는 옛글과도 통하는 말이리라.

천자문 ‘연시매최’의 적적한 구절 뒤엔 ‘희휘낭요(羲暉朗曜)’가 이어진다. -날마다 뜨는 아침해는 언제나 밝고 빛나기만 하도다- 비록 올해가 실망스러워도 내년 새아침 눈부신 태양은 떠오를 거란 격려의 말일 게다. 희망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은유이기도 하다.

그렇다. 한 해를 지우는 제야엔 회억보다 기대감으로 설레는 게 낫겠다. 새해는 올해 못다 이룬 것 다 이루는 시간일 수 있겠고, 착수 못했던 일 시작할 해일지도 모른다. 수백 만 인파가 한파와 교통지옥과 만만찮은 비용을 무릅쓰고 이 밤 일출 명소를 찾아나서는 것도 주체 못하는 설렘 때문 아니겠는가. 해서 맥없는 내 사설(辭說)도 이쯤에서 닫을 일이다. 암튼 송구영신, -나는 묵은해 보낼게요. 독자님은 찬란한 새해 맞으소서!

 

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