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염원, 지역·신분차별도 없었던 3·1독립운동

2019-02-20     경남일보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만세! 온겨레여, 궐기하자! 일본놈들이여 물러가라! 잔인무도한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날의 함성이 생생하게 들려온다,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우리 선조들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자주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은 “우리(오등:吾等)는 이에 우리 조선(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했다. 서울을 비롯, 평양, 부산, 진주 등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식민지 저항운동이다. 나라를 일본의 무력에 빼앗긴 울분에 많은 국민들이 동참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호시탐탐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일본에 전 국민이 항거한 날이다.

시작은 서울이었지만 진주 등 경남지역은 만세시위가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다. 남명 조식 선생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남다른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많은 일본인의 거주로 대규모 수탈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2013년 공개한 3·1운동 피살자 명부에 경남의 비중이 가장 높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에 정부가 공식 조사한 명부는 일부 오류가 없지 않겠지만 당시 죽임을 당한 공식 확인된 645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등재돼 있다.

1919년 3월 25일 매일신보에는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 이라는 기사에서 진주 기생들의 만세의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광복의 염원이었던 독립운동은 지역도 신분차별도 없었다. 일본의 탄압에 진주의 3·1운동은 천대받던 기생과 걸인까지 나선 독립 만세운동은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유관순, 안창호 선생은 기억하지만 경남의 독립운동가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0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면 3월 3일은 고종황제의 장례날이다.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어가던 분들은, 장례 이틀 전인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3월 18일 진주에서 첫 3·1운동은 그 당시 경남도청이 있었기 때문에 진주교회종소리를 신호로 기독교계 인사 등이 대거 참여했다. 중앙시장, 법원 등이 있던 대안동 등 5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한독립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