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이희숙)

2019-03-17     경남일보
저녁이 깔린 들녘에 하이얀 붓은
가장 먼저 바람을 그리러 섰다

갈바람에 흔들리는 그리움 주체 못하고
소리 죽이며 어둠을 덮치고 누었다

가녀린 이부자리 이리저리 나부끼다
이제 막 멈춰 섰거늘

스쳐간 흔적도 없이 요염한 저 몸매
밤은 스러졌고 바람은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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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 흔들리는 갈대를 본다, 갈대꽃이 붓처럼 저 허공에 그리움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 동안 벌써 주변은 어둠이 깔린다. 이제 수신처가 없는 저 먼 언약의 말씀들이 바람처럼 스러지고 먼 은하에서 달려온 별들이 눈을 뜨며 바람도 지쳐 드러눕는 시간, 그래도 끊이지 않는 상념은 부피로 쌓인다.

시인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서 감성을 인화하며 먼 향수에 젖었나보다, 누구도 가슴 속에 지우고 새기는 이름 하나쯤 간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이름을 헤아리며 스쳐간 것들을 보듬는 동안 지독한 아픔이 번진다.
 
주강홍(한국예총진주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