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나무들 곁에 서다(김수복)

2019-04-28     박성민
나무들 곁에 서다(김수복)

잎과 꽃들은 먼저 보내고
새와 구름과 하늘같은 옛 동지들
모두 떠나고 혈기 또한 사라져
입과 귀와 숨을 닫아걸고
이제 동안거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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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옷을 껴입어도 추위는 가시질 않았다. 인플루엔자가 세상을 지배하던 암울하고 어두운 때였다. 매스컴에서 떠드는 소리에 온전한 사람도 온전하지 못하게 하던 불안한 심리, 영화 ‘감기’에 관객이 몰리는 시기였었나? 아버지 임종을 보지 못한 죄책감이 내 몸에 스스로 지독한 전염병을 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벽에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흰 천으로 얼굴을 덮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팔남매 중 다정하지 못한 성격인 내가 아버지와 가장 잘 통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말투나 행동 그리고 정치나 책을 고르는 성향까지. 말하지 않아도 믹스커피를 원하는지 생강차를 원하는지, 그냥 알았다. 책이 귀하던 섬에서 신문으로 글자를 배웠고 활자에 대한 딸의 갈증을 아버지는 그런 방법으로 충족시켜 주었다. ‘잎과 꽃을 먼저 보내고’ ‘새와 구름’과 친구들도 떠나보내고 ‘혈기 또한 사라져’ 뼈와 살가죽만 남은 아버지. 노동으로 굳어진 손과 발을 만지며 생전에 신어보지 못한 하얀 덧버선에 꽃이 수놓아진 발끝을 하염없이 보면서 이제 우리 아버지 꽃길 걷고 가시겠구나, 비로소 동안거에 들어 편안하시겠구나. 그러면서 슬픔이 환해지는 순간을 맞기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걸릴까를 나는 또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