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제도

이수기(논설고문)

2019-05-13     경남일보
신라 이전 백제 의자왕의 최후를 맞을 때 궁녀의 기록이 있지만, 조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에서부터다. 조선시대의 궁녀 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영조 대에 쓰인 이익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환관이 335명, 궁녀가 684명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말기에는 왕실 사정이 좋지 않아 200명 정도밖에 없었다.

▶궁녀는 모두 왕의 여자였으므로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운이 좋아 왕의 후궁이 된 20대의 상궁도 있지만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상궁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궁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궁녀는 600~7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간혹 왕의 승은을 입을 수도 있지만 복권 맞을 확률보다 어렵다. 궁녀가 왕의 승은을 입을 확률은 대기업의 일반직원이 재벌 총수와 결혼할 확률과 비슷하다 한다.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조선 519년 동안 후궁은 10여 명이다. 이중 간택 후궁은 30여 명에 불과하다. 정5품 인 서열 1위인 제조상궁이 가장 높고 종 9품직이다.
 
이수기(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