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역사 재정립, 역사관건립의 첫발 의미 크다

2019-05-14     경남일보
진주시가 진주역사관 건립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1000년 진주 역사’를 담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진주역사관 건립추진위원장에 리영달 진주문화 사랑모임 명예 이사장을 선임하는 등 13명의 위원을 위촉 했다. 최근 진주에는 진주성 터 발굴 과정에서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하수구 유구 발견, 고려시대 토성, 조선시대 석성 등이 발굴됐다. 정촌 뿌리산단 건설 위한 사전 조사 과정에서 옛 강주(康州)성으로 짐작되는 성터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강주는 옛 신라시대 진주의 이름으로 1300여년 전 부터 지방 행정의 중심도시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간 진주의 오랜 역사를 재정립하고, 유적·유물 전시를 체계화하기 위해 역사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못했다. 진주는 고대-중세-근대-현대를 거치면서 북평양 남진주라는 남부내륙의 중심지역의 역사성을 갖고 있지만 진주역사를 알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없다. 진주대첩·7만 민관군 순국·농민항쟁·형평운동·진주성 해자·경남도청 등 충절의 도시란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이 많았지만 일제가 진주성, 목사관아, 객사 등 역사성을 가진 유적을 모두 파괴, 현재는 흔적조자 없이 높은 고층건물이 들어 서 있다.

역사관은 ‘진주 정신’이라는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시민정신이 뿌리를 내릴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 수많은 역사적 공간과 사적 사건의 무대가 됐으나 역사관이 없어 역사도시의 이름을 얻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평가다. 천년도시 진주의 역사의 얼을 바로세우고 보여주는 역사관 건립이 시급하다.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신문왕 5년(685)에 처음으로 9주를 정비, 거열주를 높여 정주(菁州)라 하고, 대아찬 복세로 정주총관을 삼았다는 이전의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진주성을 백제의 거열성, 기원전 3세기 때는 고순시국, 가야시대는 고령가야라는 잘못된 고대 역사도 역사관 건립을 기계로 바로잡아야 한다, 장소도 대평의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같은 실수가 없어야 한다. 진주의 오랜 역사를 재정립하고, 유적·유물 전시를 체계화하기 위해 역사관건립의 첫발을 띤 것은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