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 틈만 나면

2019-08-22     경남일보

 
틈만나면


나는 글 쓰는 척 하다가도 어스름 찾아오면

어디 술 마실 데 없을까

몇 해 전 먼 길 떠난 이의 안 지운 전화번호에도 눈독을 들이는데

당신은 틈만 나면

누구 눈에 밟히라고 저리 꽃봉오리 필봉을 허공에 드셨는가

-유종인


말은 이렇게 해도 정작 당신이야말로 순간의 찰나를 놓치지 않은 진정한 시인인 것이다. 지역마다 연꽃을 테마로 하는 축제가 한창이다. 무더위가 깊어질수록 아름답게 익어가는 연꽃의 자태에서 우리는 청순함과 순수의 꽃말에 흠뻑 빠져들곤 한다. 파크로드 그 빈틈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시인의 눈에 밟혀버린 ‘연꽃봉오리 필봉’. 시인의 상상력에 다시 한 번 디카시의 순간을 음미하게 되는 까닭이다.

나는 지금 시골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글 쓰는 척하다가도, 수차례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어디 먹을 것 없나 기웃거리는데. 홈쇼핑 화면의 노릇노릇한 간 고등어랑 쇼 호스트가 걸친 옷맵시에 순간순간 눈독 들이는데. 그래도 당신은 이토록 감칠맛 나는 디카시를 내놓았으니….

/ 천융희 시와경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