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에 스며든 진실

이석기(수필가)

2019-11-10     경남일보
모진 바람에 찢기고 장대비의 아픔 속에서도 굳건히 견뎌낸 초록물결들은 결국 가을 찬바람을 받고 선홍의 빛으로 생애를 마무리해야 하는가. 가을 단풍으로 그것도 많은 사연과 잊지 못할 그리움 때문인지 물위에 떨어진 단풍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주의를 맴돌 수밖에. 아니 맑고 투명한 물만이 저 눈부신 가을의 혼령이라 할 수 있는 단풍잎의 긴긴 사연을 읽어내기 위해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가을의 혼령은 탐스럽게 익은 열매보다 오직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일 수밖에 없다. 단풍잎의 모습에 스며든 꾸밈없는 진실의 빛깔을 보아라. 탐욕 없이 오직 맡은 일을 다 하고 살아온 최후의 모습은 결국 저렇게 깨끗한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참으로 고운 사연을 간직했지만 굳이 누구엔가 전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그래서 맑은 물에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뭇대며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생 동안의 진실이 있다면 탐스러운 열매보다는 한 잎 단풍잎은 아닐까. 생명의 진실이 작은 단풍잎 한 장이지만 그 한 장에 스미어든 깨끗하고도 빛나는 선홍의 사연을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으랴. 인생의 길에서 단풍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깨닫고 귀 기울려 들으라는 나직한 혼의 울림인 듯 초록이 단풍 되는 이치를 진실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잊고 살아온 건 아닐까.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더 가지려고 애를 쓰는 이에게, 살아가는 동안 오직 빌려 쓰고 가는 것이라고 자연은 오직 가을 단풍만이 나직이 일깨워 준다. 우리가 가진 본디의 천성이라는 것도 영혼의 방랑 끝에 결국 자연의 섭리로 돌아가는 거라고, 모든 생명의 흐름은 자연에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가을 단풍의 외침은 메아리로 울려온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혼을 담은 한 폭의 그림처럼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며 자연의 이치에 익숙해 살아온 단풍잎의 고운 빛깔처럼 우리의 남은 생애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곱게 물든 단풍잎 보며 이제는 가을볕 같은 쓸쓸한 미소가 아니라 따스함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을 아름다운 생각만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하자.
 
/이석기(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