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자벌레, 자벌레가(변종태 시인)

2020-01-05     경남일보
오일시장에서 열 개에 오백 원 주고 사 왔다는,

칠순 노모가 심어놓은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십 배는 됨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이걸 어떻게 죽여줄까를 고민하다가

먼지투성이 흙밭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온몸으로 세상을 재던 시절이 있었지

온몸으로 세상의 넓이를 재느라

어미의 생을 갉아먹기도 하고

어떤 이의 상처를 갉아먹기도 하면서,

아, 나도 노모의 생을 저렇게 갉아먹었을까.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비친 욕실,

노모의 몸뚱이에 내 이빨자국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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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을 가져가고 더 가져갈 것이 없나 찾는 게 자식이고 열을 내어주고 더 줄게 없어 안타까운 게 부모라 한다. 책에서 배운 지식이 쌓일수록 지혜로 착각하는 우리가, 세상을 자로 재듯 손해 보지 않으려 애쓰며 사는 우리가, 각박한 현실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우리가 자벌레와 다를 게 무엇인가. 화자가 그린 세상을 고요하게 들여다본다. 그림 속에는 같으면서 다른 화자의 느긋한 시선이 있고 노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있다. 그 감정이 오롯이 살아 심장을 데운다. “온 몸으로 세상을 재던” 철모르는 아이는 “어미의 생을 갉아먹기도” “어떤 이의 상처를 갉아먹기도” 하면서 세상을 잰다. 자벌레의 중첩된 이미지가 시의 맛을 끌어올리며 동시에 존재의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무수한 시간을 건너도 변하지 않는 하나, “노모의 몸뚱이에 내 이빨자국이 선한” 것. 이는 화자만이 아닌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