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마지막 나무꾼

박금태 김해서부서 여성청소년과장

2020-04-05     경남일보

내가 중학생이던 1980년대 초반, 그 시절 겨울방학이면 공부보다도 산에 땔감을 구하러 다니던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겨울방학과 그 이후 봄을 지나 군불을 때는 것이 끝나는 초여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를 따라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 땔감을 해오던 일은 오랜 추억이 되었다.

고향집은 방 두 개와 아궁이 두 개가 있는 슬레이트집과 외양간이 딸린 아래 채로 구성돼 있었다. 해거름녘이면 가마솥에는 밥을 짓고 그 옆 작은 솥에는 국을 끓였다. 이렇게 지핀 불로 방은 뜨겁다못해 눌러 붙었고 아랫목은 검게 그을렸다.

잠을 청할 때는 뜨거운 아랫목으로 인해 그만 엉덩이나 다리에 화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 말 그대로 우리 집은 뜨뜻한 아랫목이 있는 시골집이었다. 이렇게 따뜻하게 겨울을 나려면 산에서 나무를 해와야만 했다. 아버지는 매일 산에 올라서 갈비, 솔가지, 그루터기, 잡목 등을 해왔다. 그런 나무는 장작을 만들어 마루 밑이나 뒤 안의 처마 밑 외벽에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나무를 시작할 때 나에게는 지게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새끼줄로 만든 멜빵을 이용해 마른 솔잎이나 소나무 가지를 모아다가 나뭇짐처럼 둥글게 해서 지고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산길의 나뭇짐은 무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바닥이 닳아 미끄러운 신발 때문에 짐을 진 채 넘어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한번 넘어지면 기껏 모은 나무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몇 해가 지났을까. 아버지는 쇠로 만든 지게를 장만하셨다. 쓰시던 나무지게는 내 키에 맞게 잘라서 물려주셨다. 멜빵으로 나뭇짐을 졌을 때와는 달리 등짝이 나무에 찔리지 않아 좋았다. 또래 친구들은 지게에 비해 작은 나뭇짐을 보고선 “나뭇짐이 베개만 하다”고 놀렸다. 홀로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기도 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진눈깨비가 날릴 때면 을씨년스러워 무섭기도 했다.

나뭇꾼 같은 고교시절 1학년 겨울방학부터 기름보일러가 있는 읍내 집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내 또래 친구들 중에는 나무를 하는 이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들이 땔감을 준비하거나 읍내 제재소에서 나무 파지를 구해다가 땔감으로 활용했다.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나는 고향 동네 또래의 마지막 나무꾼이었던 것이다. 요즘같이 기름이나 가스로 편리한 난방을 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오르던 시절을 생각하니 격세지감 (隔世之感)을 느낀다. 그리고 아련하고, 또 한없이 그립다.

박금태 김해서부서 여성청소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