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자화상

2020-04-09     경남일보
 



그늘을 베고 잘라가며 어느새 밑동까지 왔다

여전히 삶은 쓰다



시를 썼다

-천융희



때론 영감을 받은 이미지에 제목만 붙여 침묵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침묵의 쓸모를 알기 때문이다. 가까운 산을 오르다 발끝에서 문득, 붉은 개미에게 파 먹히고 있는 밑동을 만났다. 나이테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폐한 장면이다. 마지막까지 내어주고 있는 그루터기에서 세상의 어머니를 소환했다. 나아가 인간학적 성찰 앞에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던진 것이다.


분분초초 살아가는 동안 눈만 뜨면 달라붙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 늘 사방이 분주했던 것 같다. 어긋난 것들, 엉킨 것들 등등. 삶의 그늘을 베고 자르다 보니 어느새 밑동까지 온 것 같으나 여전히 근심과 불안으로 또 하루를 보낸다. 그렇다. 나만의 시를 썼다. 그늘을 들여다보며, 때론 곁가지를 끊어내며. 스무 살, 마흔에 이어 쉰을 건너는 동안의 기억을 반추해보는 시간들. 문학으로 인해 내면의 치유를 맛보는 날이 많아진다. 봄날이 지나 가는 중이다.

/천융희 시와경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