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최영륜 (변호사)

2020-07-16     경남일보

 

주말에 서점에 갔다가 딸아이에게 그리스 신화 이야기책을 사주었다. 초등학생인 딸은 그리스 신화에서 神들이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닌) 서로 싸우고, 바람도 피고, 실수도 하는 등 사람들과 별다르지 않는 모습이 재밌는 모양이다.

같이 책을 보다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기회의 신(카이로스)’을 묘사한 부분을 보았다.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기회의 신은 앞머리가 풍성한 반면에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발에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앞머리가 풍성하기 때문에 누구나 기회의 신의 머리채를 붙잡을 수 있지만, 발에 날개가 달려있어서 머뭇거리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뒷머리는 대머리라서 일단 지나가 버리면 다시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음~ 과거에 내가 놓쳐버린 많은 기회들이 떠올라서 가슴이 쓰려온다. 고대 그리스에도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잠시 쓰린 가슴을 진정하고 책장을 조금 더 넘겨보자 ‘정의의 여신(아스트라이어)’이 등장한다. 정의의 여신은 오른손에 선과 악을 가리는 저울을, 왼손에는 칼을 들고 법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눈은 스스로 헝겊으로 가리고 있다.

옛 그리스인들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저울과 칼 같은 도구뿐 아니라, 스스로 눈을 가릴 정도의 결연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21세기 한국에서 정의의 여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상상해 본다. 신문, TV에서 매일 다양한 다툼과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수백만 명이 각자의 뜻에 따라 나누어져 집회를 열고, 재판 결과도 1심, 2심, 대법원에서 각각 달라진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찬반으로 극심하게 나눠진다. 지금 시대의 정의의 여신은 저울과 칼이 아니라 양손에 슈퍼컴퓨터를 들고 있어도 그 역할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직업이 변호사이다 보니 분쟁에 직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경찰서, 검찰청, 법정에서 각자 자신들이 주장하는 ‘저마다의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가끔 누구의 말이 맞는지, 무엇이 진실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해답은 고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 신화 속 정의의 여신과 같이, 조용히 눈을 감고 편견이나 사적인 감정에 치우침 없이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기회의 신을 놓친 것이야 맥주 한잔 하면서 쓰린 가슴을 달래면 되겠지만, 정의의 여신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니까. 어수선한 소식들로 심란한 요즘,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펼치고 우리 시대의 ‘정의의 여신’을 꿈꾸어본다.

최영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