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홍의 경일시단] 부드러운 힘

2020-09-21     경남일보
부드러운 힘 /김유석



둑방 밑에 버려진 토관을 호박넝쿨이 얽고 있다.



연두의 입술이 벌건 철근가닥을 핥고 있다.



잉잉거리는 벌 소리 꽃봉오리에 싸 가만히 들려주고 있다.



대낮의 관능은 남사스러워, 잎사귀 가리고



무른 젖꼭지를 물리고 있다.



몸을 뒤틀며 힘줄 옭아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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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을 호박넝쿨이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고 있다.

부드러우나 억척스럽게 세상을 더듬으며 초롱의 꽃을 피우고 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독이고 쓰다듬는 듯 기어오르는 저 무례함.

가만히 옭아매는 기만의 수작에

이미 얽힌 것들은 오르가즘이 한참이고

미리 제압된 대지의 아랫도리는 누런 호박이 만삭이다.



잎사귀를 뒤덮고 서둘지 않는 관능

묵은 것들의 촉수에도 새 순이 돋고

둑방 밑은 온통 비명 투성이다.



/주강홍 경남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