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알려주는 향기로운 유자
김연경 (남해군 문화관광과)
오늘 아침 사무실 향은 사뭇 다르다. 마스크를 잠시 벗고 깊은 숨을 들이쉬니 겨울이면 달콤한 향과 따뜻한 추억으로 이끌어주던 유자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유자,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외가의 뒷산에서 유자를 따 겨울밤이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유자청을 만들었다. 수제유자차는 마시기엔 간단하지만, 마시기전까지의 과정은 손이 많이 간다. 그걸 알 리 없는 나의 네 남매들은 제비새끼처럼 엄마주변에서 설탕을 뿌린, 채 썬 유자를 간식처럼 집어 먹었다. 새콤한 유자와 달콤한 설탕이 만들어낸 환상의 콜라보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유자따기와 유자청 담기는 겨울을 맞이하는 우리 집 연례행사가 되었고, 엄마는 그 수제유자청을 팔아 수입을 올렸다.
훌쩍 키가 큰 유자나무 옆에 두발 사다리를 세워놓고 올라가 유자를 딴다. 따온 유자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으면서 검버섯 같은 딱지가 앉거나 흠집이 있는 부위는 살짝 도려내고 깨끗이 잘 씻어 물기를 제거한다. 유자를 사등분으로 잘라 속은 파내고 엄마는 겉껍질을 날카로운 과도로 포를 뜨고, 나는 엄마가 포뜬 유자를 채로 썰었다. 두 팔을 벌려야 끝이 닿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에 채 썬 유자를 펼쳐 담고, 설탕을 켜켜이 뿌리고 아랫목에 두면 유자의 수분과 녹은 설탕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향이 깊은 유자청을 만들어냈다. 이 작업은 한창 잠 많은 여고생인 나에게 곤혹의 시간이었다. 긴 노동이 하루 만에 끝나기는 힘들어 다음날에는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선전포고를 하면, 엄마는 비밀병기라도 알려주시는 듯 “나중에 어른 되고, 사람을 부리고 살 때가 오면 네가 할줄 알아야 된다. 부리는 사람이 너를 속이는지 어떻게 알 것이냐, 남의 머리에 든 글도 배우는데, 보고 따라하는 유자채썰기도 못해 되겠냐. 그리고,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는 정말 채를 너무 잘 썬다” 순진했던 나는 엄마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엄마 품 안의 자식으로 사는 동안 자칭 유자채썰기의 달인이 되었다.
오일장을 맞은 남해전통시장에는 향기롭고, 때깔 좋은 유자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유자향기는 명품향수보다 향이 짙고, 유자차는 금방이라도 감기를 낫게 할 명약 같다. 유자농사가 대풍을 이루었을 때는 유자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자식들 큰학교 보낸다는 대학나무였다. 유난히 힘들게 보내는 올 겨울에는 유자차 한잔에도 향기로운 공간, 건강한 시간을 담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김연경 남해군 문화관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