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의 재정립

강용수 (창원대학교 명예교수)

2021-01-04     경남일보

유교는 인·의·예·지를 기본으로 하는 공자(B.C 551~B.C479)의 가르침이다. 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집대성했다. 유교사상을 학문적 관점에서 볼때는 이를 유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유교(유학)은 신라시대(설총, 최치원)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고려 말 성리학(안향, 정몽주)에 이어 조선에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돼 크게 발전했다. 이같은 유교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재육성기능과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제례적 기능이 있다. 교육적 기능은 중앙에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지방에 향교가 있다. 사립교육은 서원과 서당이 있다. 이 교육제도는 조선 말,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기능은 상실되고 문묘에 향사하는 제향기능만 남게 됐다.

향교는 조선시대 각 지방(1읍 1교)에 설치돼 현재 234개의 향교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 성균관과 향교는 매년 봄. 가을 2회에 걸쳐 대성전에서 석전대제(제사/무형문화재 제85호)를 지내고 있으며 매월 초하루(朔)와 보름(望)에 분향례를 올린다. 일반적으로 대성전에서 제례를 모시는 신위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5聖)순으로 배향돼 있다. 그리고 송조(宋朝) 2현과 우리나라 18현(賢)이 동무 서무에 배향돼 있다. 여기서 볼 때 공자의 위패 등은 그대로 두고, 그 외 모든 현인들의 제상이나 위패는 그 크기가 동일하게 대성전 안에서 모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지방자치 시대에 걸맞게 우리나라 18현 이외에 그 지방의 현인을 추가하여 종향(從享)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으면 한다. 8.15 광복 후 전국유림 지도자들이 모여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을 배제하기 위해 많은 위패를 매안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의 독립은 일제로부터 독립 외에도 중국과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말 민족자강운동의 하나로 서재필 선생은 독립신문을 창간(1896)하고, 독립문(1896~97)을 세웠다. 이때의 독립은 청나라(중국)로 부터의 독립이다. 사대의 예로 건립된 모화관과 임금이 중국 칙사(사신)을 영접(칙사대접)하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그 날의 기백을 잊지 말아야한다. 북경올림픽 때,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의 국가 무형문화재(제85호)인 석전대제(유교)를 배워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되새기면서 향교의 배향인물과 종향 및 그 배치에 우리의 주체성이 확립 될 수 있도록 유교문화가 재정립되기를 기대한다.

강용수/창원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