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 주도로 연행돼 코에 물 붓고 손가락에 죽침”

남해 출신 정몽호 독립운동가, 만세운동으로 겪은 옥고 담은 육필원고 발견

2021-02-25     박성민

3.1운동 당시 손가락에 죽침을 꽂는 등 참혹한 옥고를 치른 생생한 내용과 활동상황을 담은 육필원고가 발견됐다.

이번 육필원고는 지난 1월 박성석 경상대 명예교수가 남해항일운동사 및 남해향토사연구 자료수집 중 독립운동가 정몽호의 아들 정창주(90)씨가 간직하던 원고를 넘겨받으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독립운동가 정몽호는 남해 출신으로 1919년 4월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3월 18일에 있었던 하동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남해에서 궐기하기로 다짐한다. 4월 2일을 궐기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제작, 주민들에게 동참할 것으로 독려한 뒤 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4월 4일 남해읍에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남해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며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 사건으로 군중을 지휘하고 세를 키워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삼천포경찰서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육필원고에 따르면 “비공주수(코에 물을 붓는 행위)·수지죽침(손끝의 다섯 개로 갈라진 부분에 죽침을 꽂는 형)을 당하고 10일만에 진주감옥으로 이동조치됐다. 이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 방에 25명이 있어야 하는 방에 들어가 제대로 음식도 나오지 않는 상황을 견뎌냈다. 그러기를 2년 6개월,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귀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원고에는 정 독립운동가가 출옥 후 동지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생사를 알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정 독립운동가는 “동지들 중 출옥 후 즉시 병사한 사람도 있고 생계곤란 등 행방불명자가가 되거나 3.1절에 분사자가 된 자도 있었다”며 “해방 후 남해노량충렬사에서 이번 운동에 참가한 옥사자와 위령제를 하고, 유족과 생존자에게는 자리를 베풀었다”고 기록했다.

원고 마지막에는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와 조국을 향한 나랑사랑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우리가 삼일동지회를 조직한 것으로 영영히 우리 조국에 충성하며 자손만대에 애국정신을 계계승승하야 독립국가로서 세계만방에 빛내게 하는 바이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정부는 1990년 독립운동가 정몽호의 공훈을 인정해 건국훈장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박성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