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그 아무것도 없는 11월

2021-03-14     경남일보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문태준
 

눕고 선 잎잎이 차가운 기운뿐
저녁 지나 나는 밤의 잎에 앉아 있었고
나의 11월은 그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에 불과하고

오로지 풀벌레 소리여
여러 번 말해다오
실 잣는 이의 마음을

지금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
지금은 아직 이 세계가 큰 풀잎 한 장의 탄력에 앉아 있는 때

내 낱잎의 몸에서 붉은 실을 뽑아
풀벌레여, 나를 다시 짜다오
너에게는 단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을 시간만 남아 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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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11월은 잎잎이 차가운 기운이며 초라한 무덤이다.

밤의 잎에 앉은 나는 그리하여 무초(蕪草)다. 나의 11월은 생의 고통과 험난함이며 황막한 현세의 삶의 은유다. 오로지 풀벌레 소리에 몸을 맡긴 나에게 11월은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을 시간만이 남았다. 내 낱잎의 몸에서 붉은 실을 뽑아 한 방울 피까지 말라버리게 만드는 11월은 무덤위에 자라는 우울이며 무채색 삶의 희롱이며 낡은 생을 기록하는 숙명이다. 아니 어쩌면 시를 쓰는 일이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이며 그 길을 찾아가는 세계가 풀잎 한 장의 탄력에 앉아 있는 때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를 다시 짜는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는 시간처럼 나에게 시는 보이지 않은 길을 보이게 하고 열리지 않는 길을 열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 움직임은 지극히 작고 고요하겠다. 시작(詩作)의 비의는 실 잣는 이의 마음과 같은 길에서 나를 다시 짜고 있겠다. 생의 통점에 초라한 나를 올려놓고 한 올씩 잣는 내 쓰린 무늬가 생의 무거움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