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홍의 경일시단] 저, 새

2021-03-21     경남일보
저, 새 /이서린



바람에 비가 날린다

빗방울 매달린 검은 전깃줄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는 새

꼼짝 않고 저 비를 다 견뎌 내는 새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고

비에 젖어 옥상 난간 한참 서성이던 그때처럼

오지게 젖고 있는

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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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깃털 사이로 파고드는 냉기를 감당하며 그냥 허공에 눈동자를 둔 날이었다.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은 사연을 다스리며 그냥 젖고만 싶은 날이었다.

외 줄 전깃줄에 후들거리는 체중을 맡기고 무리에서 멀어진 저 새 한 마리

비상을 포기한 채 부리에 맺히는 눈물을 감당하는 그런 날이었다.



호주머니 안의 손은 시리고 신발이 물씬 젖어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날이 있었다.

항변과 저항을 포기한 체 생의 외줄에 휘청된 적이 있었다.

휴대폰의 울림은 안부를 채근해도

분별을 가린 어둠 속에서 헤아림을 묻어둔 체 망연한 두 눈을 빗방울로 채운 날이

있었다.



먼 기억의 껍질을 쪼아대는 시 한 편,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다시 젖고 있다.



/주강홍 경남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