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52] 모르는 사람 (김나영)

2021-05-09     경남일보

 

그가 뒤통수를 내어준다 나에게
나도 내 뒤통수를 깃털처럼 내어준다 뒷사람에게
우리는 뒤통수를 얼굴로 사용하는 사이
무덤덤하게 본척만척
서정과 서사가 끼어들지 않아서 깔끔하지
서로 표정을 갈아 끼우지 않아도
평생을 함께 하지 반복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권리를 위하여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서로 헐렁헐렁한 고무줄 바지가 되지
어떤 좌석에 앉아서 굵고 짧은 잠에 빠져들 때
입을 벌리고 자도 보자마자 잊히니까
평화롭지 정면이나 측면이나 측백나무처럼
한결같지 동일하게 지루해도 숨통이 트이지

내 뒤통수와 모르는 사람의 뒤통수가
내 등뼈와 모르는 사람의 등뼈가
내 엉덩이와 모르는 사람의 엉덩이가 물컹하게 겹친 적 있다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나도 뒤끝이 없지
포스트잇처럼

등을 깊게 파낸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총총 멀어져 간다

 

유채꽃이 지는 걸 오래 앉아 보았어요. 석양이 짙은 쪽으로 눈길을 두고서 말이지요. 어떤 새도 날지 않은 저녁이었지요. 날이 그리 저물지 않아 새는 아직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거나 마저 할 일이 남은 까닭이라 여겼어요. 그런 생각으로 깊어가는 저녁을 혼자 견디고 있었지요. 혼자라는 말. 한때는 익숙하고 싶었고 이제는 익숙해져야 하는 말. 사람살이가 모르는 사람 천지여서 그동안은 혼자가 된 세상에서 사는 게 그리 불편할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요. 그랬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거리두기가 아니어도 우리는 많은 일에 혼자인 때가 많았네요. 누군가 개입되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에게 요즘처럼 공식적인 모르는 사람 천지인 세상은 얼마나 편한가요. 그리고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요. 뒷좌석에 앉으면 우리는 아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괜찮고 서로의 표정을 갈아 끼우지 않아도 정말 괜찮을 일이었네요. 내 등뼈와 타인의 등뼈가 겹쳐지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네요.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권리가 많은 괜찮지 않은 일을 괜찮은 일이게 하고 있었네요. 내가 내 뒤통수를 내주고 그가 그의 뒤통수를 내주고 그러면서 우리는 뒤통수를 얼굴로 사용하는 사이였어요. 서정과 서사가 끼어들지 않아 좋은, 참으로 무덤덤하게 쓸쓸한 사이여서 더없이 좋은 일이었네요. 그러니 우리 포스트잇처럼 깃털처럼 살아요. 그냥 이렇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