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홍의 경일시단] 소주병 (공광규)

2021-05-30     경남일보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줄 알았든 소아기를 지나, 이유 없는 반항을 불태웠든 청소년기를 지나, 아버지를 배타하는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청년기를 지나, 어느덧 아비가 돼버려서 그 초라하고 고단한 마음을 이해하는 장년의 나이, 소주 한 병으로 용기를 돋우고 소주 한 병으로 피폐한 삶을 달래든 애환이 마루에 뒹구는 소주병에서 같이 만난다.

비워서 용도 폐기된, 속바람을 깊이 넣으면 신음의 악기가 되는 저 소주병, 조물주도 벅차서 떠넘긴 몫을 부성애(父性愛)란 이름으로 견디는 저 거룩한 신앙, 마루 끝자락에서 사부곡(思父曲)한 편으로 쪼그리고 있다.

/주강홍 경남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