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 내 마음속의 종교 2

고영실 (전 진주외국어고교장·신지식인 도서실장)

2021-06-14     경남일보

 

밤이 되면 하루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고, 월 말이 되면 한 달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고, 연말이 되면 1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럴 때 엊그제와 벌써라는 단어를 자주 쓰게 된다. 엊그제 새해를 맞이한 것 같은데 벌써 1년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
세월의 간격을 더 넓혀보자. 천의 자릿수가 1에서 2로 바뀐 세기라 하여 뉴 말레니엄(NEW MILLENIUM)시대라고 환호성 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아무리 세월은 유수같다고 하지만 놀랍기도 하고 무섭고 두렵다. 21세기도 벌써 21년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세상을 펼쳐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날이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 사람들과 언제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다.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주문한 물품을 퇴근하기 전에 받을 수 있고 세상의 돌아가는 상황을 언제든지 파악할 수 있다. 이제 스마트폰은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스마트폰이 없으면 외계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낀다는 노모포비아(Nomophobia) 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키고 말았다.
과학의 발달로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주고, 소득의 증대로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왜 삶은 여전히 치열하고 고독하고 외로울까? 왜 우리는 살기가 힘든 걸까?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고갈되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종교(宗敎)에 노크를 하게 된다. 종교를 한자로 풀이하면 으뜸 종에 가르칠 교. 즉, 으뜸되는 가르침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교육자이자 위대한 계몽자이다. 종교의 사전적 의미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불교에는 재가오계(在家五戒)가 있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로 재가 불자가 지켜아 할 다섯가지 계율이다.
기독교의 십계명(十誡命)은 열 가지의 말씀 중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이고 5계명부터 10계명 까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의 말씀이다. 즉,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며,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고,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불교와 기독교 정신은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종교의 원리는 같을 것이다. 정직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약자에게 배려하는 것이다. 또한 남이 보지 않을 때 더 철저히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남이 볼 때는 올바르게 하지만 남이 보지 않을 때는 질서와 규칙을 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의 예로 몇 천 원의 돈이 아까워서 남이 모르게 교묘하게 불법 주차를 했지만 주정차 위반 과태료 부과 통지서를 받고서야 후회를 한다. 유교의 실천덕목인 신독(愼獨)도 마찬가지로 남이 알지 못하고 보지 않을 때, 홀로 있을 때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가지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보면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숫자나 외적인 모습으로 일희일비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것이다.
우리가 불교, 기독교, 가톨릭 등 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내 마음속의 종교를 가져보자. 내 마음속의 종교는 남이 보지 않을 때 올바른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고영실 (전 진주외국어고교장·신지식인 도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