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함양박물관

안명영 (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2021-09-01     경남일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화보로 벽을 꾸미고 시선이 가는 곳에 ‘묵향의 꽃이 피는 선비의 고향’이라고 제목을 붙인 박물관 입구이다.

들어서면 함양 역사를 볼 수 있다.

박혁거세왕 1년(BC57) 속함군 또는 함성이라 칭함,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함성(含城)을 천령군으로 개칭, 헌강왕 2년(876) 심광대사 영각사(서상면 상남리) 창건. 진성여왕 5년(891) 고운 최치원 천령태수 역임(대관림 상림 조성).

고려 현종 1년(1010) 진주목 12현 중의 하나에서 함양군으로 환원, 우왕 6년(1380) 사근산성 전투로 장사 장사군 외 1명과 사졸 500여명 전사하고 함양읍성 소실되었다.

조선 명종 7년(1552) 일두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개암 강익(介庵 姜翼)을 중심으로 서원을 건립하였고, 명종 21년(1566) 두 번째로 남계(藍溪)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최초 사액서원은 주자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을 배향하는 백운동서원이 명종 5년(1550)에 소수(紹修)로 사액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으로 불타고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겼다가 광해군 4년(1612)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전학후묘(前學後廟) 서원의 독창적인 건물 배치 형식의 기준을 마련하여 이후 건립되는 서원의 전형이 되었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양은 삼한시대 변한의 변방에 속한 지역이다. 변한 지역에 가야국이 성립되면서 가야시대가 열렸다. 함양은 대기야에 속한 지역이지만 소가야(고성) 양식의 토기가 발굴되고 있다.

함양 가야 토기는 모래를 완전히 제거한 진흙을 원료로 하여 물레를 써서 다듬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토기를 굽는 가마는 평지에 만든 가마 보다 오름 가마를 사용하여 1100℃~1200℃ 이상의 온도로 가열하였다.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하며 물에 뜰 정도로 가볍다. 높은 온도로 인해 태토 내의 장석 등이 녹아내려 자연적으로 유약이 발라져 물을 전혀 흡수하지 않는다. 이런 기술은 일본의 토기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 굽다리 접시와 각종 항아리, ∪형 토기, 그릇받침이 주로 출토되고 있다.

공기흐름이 클수록 화력이 좋아 연통을 세우면 더 잘 탄다. 이는 산소 공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평지 가마보다 오름 가마가 연기가 잘 빠지고 화력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지형과 자연의 이치를 이용하는 함양인의 지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1층에 의미 있는 공간이 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문화재체험실이다. 기와집 알기, 공포 쌓기, 고지도 맞추기, 토기 퍼즐 맞추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흥미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기와지붕 모서리를 확대하고 명칭을 붙였다. 암키와는 기와 바닥에 까는 것, 암키와 위에 올라가는 수키와, 귀신 얼굴을 그린 장식은 귀면, 암키와를 얹은 후 끝을 마무리하는 암막새, 수막새는 수기와를 얹은 후 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명칭을 숙지한 후 부품을 하나하나 옮겨 실체를 완성한다.

공포 쌓기이다. 공포(?包)란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댄 나무쪽이며 주심포과 다포쌓기를 하나하나 맞춰본다. 고지도 조각을 맞추면 오늘의 지형과 비교할 수 있다.

자석으로 제작된 목이 긴 항아리를 해체하여 그림을 보면서 짜맞추기를 놀이 삼아 하다가 완성되면, 성취감을 맛보면서 저절로 이 지역 문화재를 알아가는 돋보이는 프로그램이다.

함양은 광역 박물관이다. 인근 ‘고운광장’에 들어서면 필봉산 자락에 ‘최치원선생역사공원’이 있다. 고운루에 오르자 조금 전에 학습한 공포, 주심포, 다포, 암막새, 수막새, 귀면 등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고운기념관 계단 좌측에 문창후최치원상, 우측에 회색의 돌을 세우고 그림인 듯 네 글자를 새겼는데 지나치지 말라는 듯 “다른 사람이 백번을 노력하면 나는 천 번을 노력 한다”라고 한글로 풀이하였다. 요리조리 궁리한 결과 ‘인백기천(人百己千)’이다.

12세의 최치원을 맨몸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면서 부친 최견일은 “10년 안에 과거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로 결심을 다지게 한다.

최치원은 人百己千의 각오로 공부하여 18세(874)에 빈공과에 급제한다. 이는 시대를 넘어 오늘의 남녀노소에 해당되는 교훈이다.

안명영 (수필가·전 명신고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