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사범과 반면교사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2021-10-13     경남일보
내가 국립대학교 교수로서 발령을 받았던 지도 엊그제 같다. 세월이 물처럼 흐르는 것을 어찌 세월을 탓하랴. 세월이 흐르는데도 앎과 삶의 하나를 좇는 지식인으로서 내 생각이 크게 바꾸어지지 않는다면 정녕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에 이르러 교육이란 게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보니, 편견이 없는 사람을 길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 인종차별, 소수자 차별, 증오범죄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고등학교 과정의 사범학교가 있었고 지금은 종합대학교 아래 사범대학이 있듯이, 사범(師範)이란 말이 있다. 한때 무술 도장이나 기원에서도 사범님, 하는 호칭이 일반적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한중일이 공통으로 쓰는 이 낱말은 근대어 같지만, 멀리 논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르되, 학문을 도야함으로써 남의 스승이 되고, 이를 실행함으로써 세상의 모범이 된다. 이 공자의 어록에서 사범이란 두 글자가 나왔다.

사범과 반대되는 낱말도 있다. 반면교사다. 이것은 중국 문화혁명 기간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모택동은 ‘반면교재’란 말을 쓴 바 있었다. 마르크시즘과 마오니즘의 가르침에 반(反)하는 온갖 사상들을 가리킨다. 고대의 공자, 맹자로부터 시작해 동시대의 반동과 수정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그렇고 그런 사상을 가진 모든 지식인들이 곧 반면교사다. 이런 예문이 있다고 하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대량살상의 주범인 히틀러를 인간성 회복의 반면교사로 삼아왔다. 딱 들어맞은 말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타산지석이라고 바꾸는 게 좋겠다. 모택동 어쩌고 하듯이, 발생기원적으로도, 썩 좋은 말이 아니니까. 어쨌거나 글자 그대로의 뜻에 따르면, 반면교사란 나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선생을 말한다.

지금 왜 교육인가? 올해로 9·11테러 20주년이 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교육은 도덕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사람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보인다. 그만큼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의 교수들에게도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된다. 앞으로 교사가 될 학생들의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새 시대에 맞는 학문을 깊이 연마해야 하고, 생각이나 행동은 늘 모범적이어야 하지 않나?

예컨대 공익의 개념조차 모른 채 사익 추구를 향유하는 경우, 교내외를 가리지 않고 특정 종교의 활동에 여념이 없는 경우, 수업 시간에 정치적인 발언을 일삼거나,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 등등. 스승된 이로서 모범적이라고 어디 말할 수 있겠나? 대부분은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일상화되어 있을 뿐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른다. 또 가르치는 이의 폭언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평생토록 상처를 남긴다. 지도 과정에서 폭언은 인정하지만 훈육을 위한 것이었다 이래선 안 된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인권침해만큼 더 이상 비교육적인 것은 없다.

사범이냐, 반면교사냐? 사실은 이 물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성찰이다. 이마저 없다면, 문제 중의 문제다. 교육에서, 교육 주체의 도덕성 질적 제고가 무엇보다 긴요하다.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