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멋

이정옥 (경해여중 교사)

2021-11-03     경남일보

 

멋있어지기가 어려워졌다. 편리함에 밀려 멋쟁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간지 난다’. ‘뽀대 난다’ 같은 뜻도 없고 멋도 없는 말들이 무질서하게 쓰인다.

주민센터에서 우연히 이런 글을 읽었다. ‘10년 뒤에 인간이 컴퓨터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즐기는 일뿐이다.’ 즐기면 된다니. 밀려난 옛 멋이 되돌아 올 것 같아 반가웠다.

어릴 때 아버지 따라갔던 동네 다방은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식전 쌍화차와 조간신문, 입담 좋은 마담과의 농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두루마기에 중절모, 백구두 차림의 외출의 마무리도 다방에서 끝냈다.

개화기 카페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이상도 카페를 경영했다. 특유의 위트와 패러독스로 자기만의 공간을 연출하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댄디보이가 되었다. 맥, 쓰루, 69에서 김동리와 손소희가 커플이 되고 정지용은 붙박이처럼 드나들었다.

명동의 백작이라 불리던 박인환도 다방애호가였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의 그가 명동에 나타나면 뭇 여심이 흔들렸다. 한여름에도 재킷을 입고 빳빳한 셔츠로 멋을 내면서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를 수 있는 명동의 겨울을 기다렸다. 이상의 허무주의까지 추종한 나머지 죽는 날도 그의 기일에 맞췄다. 이러한 박인환의 삶과 멋에 취한 박태원, 이효석이 카페 문화에 빠졌다. 뮌헨의 고독을 절절히 앓다 간 전혜린 문학의 기저에도 기실은 다방문화가 작용했던 셈이다.

이렇듯 서울의 근대화는 카페에서 왔고 천석꾼 만석꾼의 자제들이 커피에 심취했다.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 일필휘지하는 글솜씨, 서구에서 익힌 합리적인 사고로 케케묵은 조선의 인습을 타파했다. 자존심이기도 했던 멋 하나로, 없이 살아도 궁상맞거나 인색하지 않았고 어려운 이가 손 내밀면 애장품을 내줄 정도로 호방했다. 특유의 휴머니즘과 반전이 있었던 그때의 멋 문화는 아련한 향수와 함께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길상사의 전신인 대원각은 월북작가 백석을 기다리던 김영한의 카페였다. 좋은 곳에 써달라며 평생 모은 재산을 길상사에 시주할 때 그 많은 돈 아깝지 않냐고 법정이 물었다. “천억? 백석의 시 한 줄 값도 되지 않는다”고 일갈한 여걸의 행보는 성북동 술 카페를 인간미 넘치는 법당으로 만들었다.

멋없는 인생은 밋밋하다. 건조하기 그지없다. 앞으로는 즐길 일만 남았다 하니 이왕이면 그 옛날과 같은 멋이 진주에서부터 되살아나면 오죽 좋을까 한다.

이정옥 경해여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