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폭발 사주와 고발 사주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2021-11-09     경남일보
1873년에, 10년 동안 개혁과 쇄국을 동시에 추진했던 한 시대의 실권자 대원군이 하야했다. 이때부터 민씨 척신의 세상이 되었다. 중전 민비의 오빠 민승호가 권력의 중심부에 선다. 1874년, 그는 선물이라고 전달된 상자 속의 폭발물이 터져 폭사하고 만다. 중전의 친정 일가족이 참사를 당했다. 또 이듬해인 1875년에는 부정부패의 정승인 이최응(대원군의 친형)의 집에 화약이 터져 큰불이 났다. 민비 측에서는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범인을 색출했으나,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이 역시 대원군이 폭발을 사주한 것이란 심증을 굳혔다.

수사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이 생겼다. 술객(術客)이라고 자처한 장기삼이, “사주하기는 누가 사주했단 말인가…” 이 말만 되풀이하다가, 매를 맞아 죽었다.

장기삼은 평소 신철균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었다. 경남 의령 출신인 신철균은 진주병사(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다. 대원군의 측근이었으나,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관직에서 쫓겨나 서울에 올라 와 있었다. 그는 대원군의 측근이란 이유로 장기삼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대원군이 시켰지?” “아니오.” 이 말만 되풀이 하다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를 당했다. 가족들은 노비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대원군은 세칭 ‘천하장안’ 네 사람에게 그의 시신을 거두어 후히 장사를 지내주라고 명했다. 이처럼 대원군이 폭발을 사주했음을 밝히지 못하고, 대신에 애먼 사람만 잡았다.

1870년대의 폭발 사주 사건과 지금의 고발 사주 사건은 우리에게 무언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억울하게 죽은 장기삼과 신철균은 지금의 김웅과 손준성으로 연결된다. 지금이야 왕조 시대가 아니니까 생사람을 잡기까지 하겠냐마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 정치적인 저의나 목적에 따라 억지로 생청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 결정적인 증거(실체)가 없으면, 더 이상 무리해선 안 된다는 것….

사실은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고발 사주의 수사가 특정인을 대통령 후보로 뽑히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그 특정인이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말았으니, 수사 결과를 놓고 볼 때 공수처는 빈손(空手)이 된 곳(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나는 대신에 ‘법불아세’란 말을 떠올려 본다. 아세의 ‘세’는 세(世)상일 수도, 권세(勢)일 수도 있다. 법은 여론이나 권력에 아부해선 안 된다. 법이 여론에 휘둘리거나, 권력의 수단이 되면, 반드시 부패하게 마련이다.

작년에 공수처의 탄생을 놓고, 여야 간에 격렬한 정쟁을 겪었다. 공수처는 정치적인 중립이 존립 근거이다. 특정인이 검찰총장에 재직할 때 불법적으로 검찰권을 농단했음이 밝혀지면 응당 대통령 후보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맞는다. 마찬가지의 논리대로라면, 특정인을 정치적으로 궁지로 몰기 위한 수사, 곧 정치 공작의 일환임이 밝혀진다면, 공수처 역시 해체되어야 한다. 설립 목적이 정치적으로 불순하기 때문이다. 공정과 형평성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이게 바로 공정이요, 형평성이다. 우리 시대의 가치다.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