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빛나는 쪽팔림

이정희 (시인 프리랜서)

2021-11-15     경남일보



‘쪽팔림’은 ‘창피하다’, ‘부끄러워 체면이 깎이다’의 속어이다. 때로는 이런 속어가 감정선을 빠르게 자극한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한 번 쯤은 겪지 않았을까?

쪽팔림을 당하려면 제대로 당해야 한다. 당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반작용과 선작용으로 갈리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창피를 받으면, 반성하기보다 반항심이 인다. 창피를 줄 때는 마음을 담아 세련된 방법으로 줘야 제대로 반성하게 된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적부터 20대 초까지는 새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귀엽고 애틋한 막내의 태생적 특권은커녕 언니, 오빠들이 누대로 입고 전해주는 낡은 누더기 옷이 내 차지였다. 친구들처럼 까슬까슬한 새 옷을 입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내 삶의 전체에서 딱 한 번 막내 짓을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붉은 꽃이 한창 피어오르던 날, 보따리 옷장수가 집에 와서 마루에 옷을 펼쳐놓았다. 눈이 뒤집힐 만큼 예쁜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원피스가 보였다. 얇은 어깨끈이 달린 화려한 원피스였다. 엄마를 졸라서 겨우 하나 얻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옷차림으로 등교를 하려니 가족들이 못 입게 난리였다. 속치마를 겉에 입고 어디를 가느냐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뜯어말렸다. 이렇게 예쁜 옷을 왜 속에 입냐고 반발하면서 기어코 그 차림으로 등교했다. 친구들은 부러움으로 난리였다. 당당한 걸음으로 운동장 복판을 가로질러 교실에 들어갔다. 급우들의 환호성과 부러움을 받으니 어깨는 절로 높아졌고, 목은 뻣뻣해졌다. 드디어 선생님의 칭찬만 남았다. 선생님은 온유한 웃음을 띠며 나를 교탁 가까이 불러서 귓속말로 일렀다. “옷이 참 예쁘구나. 하지만 이 옷은 속치마이니 내일부터 속에 입고 오너라.” 선생님의 자상한 음성과 온화한 미소에 지금까지 붕 떴던 기분은 순간 나락으로 패대기를 당했다. 영문도 모르는 친구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분홍색 속옷은 절대로 입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교단생활에서 그 선생님은 큰 거울이 됐다.

대놓고 당하는 쪽팔림은 심적 상처가 매우 크다. 반성은커녕 절망을 하거나 분노의 극대화를 가져와서 자칫 보복심의 반작용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마음속 짙은 애정과 상대에 대한 넓고 깊은 배려심의 쪽팔림은 깊은 반성을 하게 한다. 나아가 자아발전의 발판이 되며 행동 발전의 선(善)작용을 주게 된다. 쪽을 팔아도 제대로 팔아야 한다. 내면 깊숙한 울림의 쪽팔림을 당해야 ‘자기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정희 시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