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일몰 예찬

이정옥 (경해여중 교사 수필가)

2021-11-24     경남일보



오후 6시, 완전히 해가 졌다. KBS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 시그널 곡인 콜린 블런스튼이 부른 ‘Tiger in the Night(밤의 호랑이)’가 어김없이 흐르고. 삶의 일부가 된 저녁의 음악은 내가 있을 곳에 와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우연히 제대로 된 낙조를 봤다. 짐작건대 해가 떨어지는 곳은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리산 영신봉쯤 되었다. 노을이 사방팔방으로 뻗고, 오르고, 퍼지고, 번지다가 층층이 스미고, 밝히고, 태우는. 천연의 빛들이 해를 에워쌌다. 무쇠를 녹이고 굳혀서 다시 불을 부어 녹여낸 것처럼 뜨겁고 무거운데도 무심한 불덩어리가 옥녀봉, 하동 금오산, 사천 와룡산을 향해 텅, 텅 내려왔다. 마지노선인 낙남정맥 능선에서 머문 듯 접고, 접고, 반 접더니 뜬금없이 꼴깍 사라졌다. 강도 산도 섬섬한 어둠살에 묻혔다.

몽골에서 본 일몰이 겹쳤다. 모든 것에 품을 열고 다 품어 줄 것 같은 광활한 땅은 야생화 지천인 초원을 지나 까마득한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고대의 산맥과 칭기스칸이 달렸을 길과 고비 사막의 모래로 된 언덕과, 협곡과 협곡 사이를 관통하는 강물이 석양에 물들었다. 지는 해의 후광이 뜨는 해의 전조만큼 명예로운 신의 땅이었다.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포식자들에게 쫓겨 다녔다. 사자와 맞닥뜨리고 늑대에 쫓기고 독사로부터 달아나야 했다. 포식자들도 잠자리에 돌아가야 하는 저녁이 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구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눈을 들어 쳐다본 일몰은 얼마나 아름답고 편안했을까. 그 기억이 오랜 세월에 걸쳐 유전자로 각인됐다. 지난 대선 때 ‘저녁이 있는 삶’을 공약으로 내 건 정치인의 구호도 이런 저녁에 대한 아쉬움을 반영한 것이고, 밀레의 ‘만종’도 노동 끝의 안식과 황혼녘의 기도로 인간이 얼마나 자연에 밀착된 존재인가를 그렸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생텍쥐페리는 비행 도중 만난 일몰의 경이로움을 “완벽함이란 더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함이다”라고 그의 소설 ‘야간비행’ 에 피력했다.

춥다. 늦기 전에 촉수 낮은 불빛과 질화로가 있는 집으로 가자. 거기 빈 가지로 겨울을 견디는 나무의 모성애를 연민하면서 초조히 마음의 평온을 구하자. 초인간적인 덕성을 쌓기에 이만한 시간이 없다. 오늘 저녁의 일몰은 또 얼마나 황홀할는지.

이정옥 경해여중 교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