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아버지의 술잔

박상재 (전 서진초등학교장·청렴 및 학부모교육 강사)

2022-01-24     경남일보



해마다 하늘이 멀어지고 푸른 빛이 더욱 선명해지면 가을에 떠난 아버지가 생각난다. 4형제 막내로 태어나 모진 고생하며 모은 돈으로 형님의 장남들을 모두 거둬 그 어렵던 시절 대학을 모두 공부시켰다. 아마 자기가 못배운 한을 조카들을 통해 대신 풀었으리라.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형님들처럼 엄하게 혼나지도 않았고 한 번씩 용돈도 주셨다. 아버님은 유독 형제애와 효를 강조하셨다.

내가 어릴적 할아버지 산소에 가면 아버지는 큰소리로 ‘60을 모두 못넘긴 큰아버지들의 수명을 안타깝게 여겨 큰아버지 한 명당 5년씩 15년, 75살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소리내어 간절히 비셨다. 소원이 통해서인지 아버지는 76세에 영면하셨다.

자식들 힘들게 하지 않겠다며 그 추운 계절에 불을 피워 놓고 일꾼들과 집안의 모든 산소를 한곳으로 모아 자기 손으로 직접 선산을 정리하시고 가셨다. 금년 기일은 몹쓸 태풍으로 빗속에서 아버님 산소에 국화 한 송이 올리고 추모하니 목이 메여 한참을 울었다. 아버님의 형제 산소 바로 밑에 형제 들어갈 자리를 정리하고 보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나는 아버지 눈물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눈물은 마시는 술잔 속에 있음을 알았다. 술잔의 반은 아버지의 눈물이었음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식에게 젖물리고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이며 사람의 뒷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저녁놀이 온 마을을 물들일 때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마른 솔가지를 꺾어 군불을 때는 엄마의 뒷모습이다. 눈물로 걷는 인생의 길목에서 가장 오래, 가장 멀리까지 배웅해 주는 사람은 바로 우리의 가족이며 부모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부모를 보냈다’는 탈무드의 말이 떠오른다. 자식 사랑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하면 모두 효자라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내 자신을 탓한다.

백리부미(百里負米)라, 자로는 부모를 위해 백리 길을 쌀을 져와 부모를 봉양했다는데, 나무가 잎 다 놓자 그림자도 따라갔다/푸른 나날 빠져나가 멍든 몸만 덩그러니…한평생 고생하신 여윈육신 거두어 갈 때/구십노모 우리 엄마 그랬다. 자식 뒤에서 흘리는 부모의 눈물은 애간장이 곪아 터진 피고름이다.

날 키우신 우리 부모님! 얼마나 피고름 흘리시며 남몰래 술잔 속에 눈물을 담으셨을꼬. 해마다 기일이 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박상재 전 서진초등학교장·청렴 및 학부모교육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