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칼럼]그러니, 인생은 차라리 춤 같은 것

심근아 (경상국립대 신문사 편집장)

2022-03-17     경남일보

나는 죽음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의미의 죽음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 사회는 ‘죽음’이라고 하면, 대개 자살로 생각하거나 피해야 하는 주제로 여겼으니까. 그래도 난 이 고민을 꺼내야만 했다.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혼자서는 죽음에 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에 대한 해답 하나를 우연히 마주했다. 포털사이트의 익명 질문 게시판이었다. 질문자는 이렇게 물었다. “‘현재’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우연한 지점이고 이 모든 게 경이롭지만, 존재를 잃을 미래가 확정되어 있으니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회의감이 든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답변자의 글은 질문자만큼이나 깊었다.

“무의미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 사랑은 번식욕에 이끌린 착각이지만, 사랑이 생긴 진화의 과정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미각과 포만감이 그저 살아가기 위한 자극이라도, 야심한 새벽 나가 먹은 국밥에 뜨끈함을 느낄 수 있다.” 작성자는 말한다. 존재가 가진 한계는 실존을 바라볼 때 잊을 수 있다고 말이다. 실존은 ‘순간’에 있으며 무의미 속에서 순간은 이어진다고. 순간에 어떤 의미를 쌓느냐가 실존하는 사람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차라리 춤 같은 것’이라고.

언젠가는 이 삶이 끝날지라도 지금 실존한다는 것, 즉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 과정’을 사랑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게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린 선택할 수 있다. 각자의 삶과 죽음을 어떠한 의미로 채워나갈지를 말이다. “모든 것이 꾸며진 의미라면 어떤 신기루를 어떻게 좇을 것인지, 신기루에 닿을 수 없을지라도 신기루를 사랑하는 길이 있길 바란다”라는 메시지를 답변자는 마지막으로 전한다.

어쩌면 죽음은 삶만큼이나 어렵다. 삶만큼 심오한 게 죽음이고 삶만큼 치열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게 죽음이다. 하지만 죽음 또한 삶의 일부이기에 죽음을 잘 이해해야 삶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살아간다는 건 사실 죽어간다는 것,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그 사실을 직면하고 고민해야 더욱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음의 끝에서 하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여타 다른 고민처럼 죽음도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사회가 오는 것이다. 논의의 종점에 다다른 모두가, 자신만의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