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진주 백정들이 만든 ‘소 한 마리 탕’과 ‘서울 설렁탕’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2022-04-06     경남일보

 

장마당에서는 매질을 당했다. 아비가 만든 가죽신도 신을 수 없었다. 어미의 둘레 머리에는 비녀조차 꽂으면 안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백정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다. 수백 년간 삶을 도륙 당해온 백정(白丁)들은 봉기했다.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 형평사운동이다. 형평운동은 백정의 계급적인 해방투쟁과 민족적인 해방투쟁의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1895년 관아에서 개설한 상설시장이 들어서자 백정들은 정육점과 식당을 차려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메뉴는 갈비뼈, 양지, 도가니 등을 한데 넣어 끓인 ‘소 한 마리탕’이었다. 백정들의 우탕(牛湯)은 시장비빔밥과 함께 고단한 서민들을 위한 감사한 한 끼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진주에 육류품 가공공장까지 들어서면서 백정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동성동에서 진주성 동문으로 가는 길목은 조선시대 소전거리였다. 진주 우시장은 서부경남 일대를 관할할 만큼 규모가 컸다. 대규모 도축이 가능했다. 관아에서 소고기를 싼 값에 징수한 것도 우시장과 백정들 덕분이었다. 갈비 한 짝의 값이 3돈으로 소주 한 국자와 같았다.

진주형평사운동은 들불처럼 퍼져나가 전국 약 8000명의 백정이 모인 사회단체로 확대되어 서울에 본부를 두게 된다. 형평사 조직을 만든 진주 백정들 중에는 서울로 진출한 자도 있었다. 김두한(1918~1972)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형평사본부 부의장 원영기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푸줏간 한편에서 설렁탕을 끓였다. 설렁탕 맛에 너도나도 혹했다. 값도 저렴하여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백정만큼이나 천인이었던 토기장이들이 만든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뜨끈한 설렁탕은 서울의 대표적인 배달음식으로 부상했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대표적인 유흥가는 광교통 옆 무교동이었다. 그곳에 진주 백정이 차린 간판 없는 푸줏간과 방석집인 ‘진주집’이 있었다. 진주집에서 흘러나오던 장고소리는 아마도 진주의 마지막 기생이 부른 망향가였을 것이다.

교방음식에는 유난히 소고기를 재료로 사용한 것이 많다. 세종기에 시작된 진주의 소고기 문화를 이어준 주인공은 바로 진주의 백정들이었다. 뽀얀 우탕에도, 진주비빔밥에 곁들이는 선지탕에도 “우리도 사람이외다”를 외쳤던 진주 백정들의 이야기가 선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