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80)서머 에비뉴에서의 다짐(심재휘)

2022-08-07     경남일보

 



지난봄 그대에게 쓴 나의 글자들은

끝내 뜻을 만들지 못하고 구름이 되었다

나를 따라 여름에까지 이르러서는

간밤에 마저 내리는 비가 되었다

비 갠 이튿날은 늘 별 뜻 없이 맑고

손잡은 가로수들을 따라 집을 나서면

걸음은 서머 에비뉴 끝의 가을로

간다는 것이었다

하늘은 상처 하나 없이 청명했다

아주 흘러가 버리기 전의 물글자들은

은 포석 위에서 글썽거렸다

굳은 다짐을 하기 전의 어떤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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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산책…… 폭염주의보가 연일 전송되어 옵니다. 무자비한 땡볕과 열대야. 낮과 밤이 밀가루 반죽처럼 물렁해집니다. 이럴 땐 시간적 공간화가 필요할 것 같아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을 상상하면서 습한 날과 폭염과 열대야는 여름 한가운데서 생겨나는 블랙홀이라 여기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녹아내리는 낮과 밤을 단단하게 잡아줄 시를 읽어보는 거예요. 서머 에비뉴에서의 다짐 같은 가슴 서늘한 시를 만나면 더없이 좋을 일이겠어요. 지난봄 그대에게 쓴 글자들이 끝내 뜻을 만들지 못하고 구름이 되거나 여름까지 이르러선 간밤에 마저 내리는 비가 되거나. 글자는 처음부터 물이어서 굳은 다짐을 하기 전엔 어떤 표정도 가능한 일이겠죠. 하여 가로수를 따라 집을 나서는 걸음이 여름 거리의 끝을 지나 가을로 간다는 것이겠죠. 하늘은 청명하고요. 상처 하나 없으니 이쯤에서 글자들은 문장이 되려나요. 문장은 글썽거리는 여름에서 수많은 초록의 잎과 환호성이 되겠지요. 그러니 이 순간을 새롭게 경험하는 생의 아름다움이라 믿어보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