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추억이 흐르는 곳

정민영 (한국화가)

2022-08-31     경남일보


지금 나는 오래된 기억의 편린, 추억을 끄집어내어 그림의 주된 소재로 삼아 작업을 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나만의 추억이 담긴 곳이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추억이란 각양각색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진주, 특히 과거에 ‘배 건너’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망경동 지역이다.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배 건너에서 그림을 그리며 가족들과 함께 생활해 왔으며 지금도 살고 있다.

그러나 과거 나에게는 단 한 번의 일탈이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때 부모님은 “교사를 할 수 있는 사범대학엘 가야 한다”고 강권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간곡한 뜻을 저버리고 진주를 떠났었다. 그것도 진주에서 최대한 먼 곳,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대학을 가자고 마음먹었다. 오직 나만이 홀로 생활하고 모든 것을 나만을 위해 살자는 마음으로 떠났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곳은 실제 진주에서 가장 먼 곳 강원도 강릉이었다.

나는 강원도에서 일탈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추억을 쌓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어디에 얽매이지 말고 즐기자는 심사였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강원도의 산, 강, 계곡, 바다로 돌아다니며 추억을 쌓았다.

당시 시국도 어수선해서 대학은 시도 때도 없이 휴학했다. 마치 나의 해방을 응원이라도 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이 덕분에 나의 여행은 거칠 것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강원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에 담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젊은 시절 전공이었던 조소를, 한국화로 바꾸게 됐다. 이것이 계기가 돼 나는 또 한번의 여행을 강원도로 떠났다. 대학시절 마음에 담았던 산과 바다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강원도의 풍경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산야를 떠올리며 현재의 산과 비교하며 여행을 즐겼다. 아찔하고 아련하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지금 두 번째 여행에서 돌아와 오래된 과거의 추억을 머릿 속에서 끄집어내어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흔적에 흔적이 모이고 쌓일수록 추억은 더욱 더 또렷해진다. 그리고 그 추억을 안고 새로운 삶을 꿈꾼다. 강원도의 아름다운 풍경, 아련한 추억들이 개천에서 강으로, 드넓은 바다로 향해간다. 그 시절 가슴에 새겼던 풍경들이 화폭에서 춤을 추는 듯하다. 한 번의 일탈이 나에게는 새롭게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