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가을을 진상하다, 진주의 중양절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2022-09-29     경남일보


가정숲도 개정숲도 어느새 넉넉한 가을빛이다. 삼짇날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가 바다 멀리 되돌아간다는 중양절. 홀수는 양이고 짝수는 음이니, 9월 9일 중양절은 양이 겹치는 길일이요, 9자의 상징인 장수의 날이다.

진주향교에서는 노인들을 공경해 받들고 보살피는 이른바 양로연(養老宴)잔치가 한창이다. 해마다 8월에 베푸는 양로연은 서울에서는 임금과 왕비가 대궐에서 베풀고, 지방에서는 수령이 베풀었다. 한 날 한 시에 남녀를 구별해 내외(內外)로 나누어서 베풀었다. 장막이 쳐지고 깨끗한 돗자리가 깔렸다. 수령은 아침 일찍 예복을 갖추고 자리에 선다.

관아에서 미리 준비한 음식은 들것(架子)에 싣고, 야외에는 임시 조찬소가 마련된다. 장수를 기원하는 국수에 떡, 고기, 생과, 유과, 전유어, 나물과 초장, 그리고 꿀까지 구색을 갖춰 차려진다.

수령은 노인들에게 1년생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 청려장(靑藜杖)를 선물한다. 중풍을 방지한다 하여 통일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다. 가볍고 단단한 지팡이로, 건강·장수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의 중양절은 각별했다. 들판은 기름지고 토산은 풍족해 절기식의 재료 모두가 진상품이었다. 진주 화채는 단언컨대 최고의 전통 음청류다. 오미자차에 해풍을 맞고 자란 튼실한 유자와 달기로 소문났던 진주 배를 가늘게 채 썰어 석류와 해송자(잣)를 띄운다. 화채 한 사발에 가을이 스민다. 오늘 하루는 느리게 살기다. 좋은 안주에 깊은 술동이를 옆에 두니 서두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중양절엔 국화전을 지지고 국화술을 담갔다. 감국을 베보자기에 싸서 한 말 술독에 넣어두면 향긋한 국화가 겨우내 익어갔다. 맛도 향도 맑은 술이다. 술잔에 국화꽃을 띄우는 ‘범국(泛菊)’은 선비들의 소소한 낭만이었다.

국화며 석류, 유자, 배 같은 진주의 특산품들은 대궐로 진상됐다. 진주성 병마절도사는 매달 왕실의 경사나 탄신일, 행사에 조달할 품목들을 진상했다. 경기도는 매일 진상을 했고 지방은 한 달에 한번 진상품을 올려 보냈다. 진상품은 주로 현물로 바치기 때문에 썩는 일이 많았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에 절이거나 꿀에 재웠다. 왕족이 단명했던 원인 중 하나는 염도가 높은 음식 섭취로 인한 고혈압이었을 것이다. 제철 재료로 만드는 교방음식의 우수성이 한층 돋보이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