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진주 수령의 첫 번째 진찬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2022-10-27     경남일보


1604년은 또 다른 격변기였다. 진주성에 경상우병영이 설치된 것이다. 느닷없는 일이었다. 거대한 관청이 들어서자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세금이 가중되었다. 수천 명이나 되는 군관들의 접대를 견디지 못 한 백성들이 병영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령이 부임하면 반드시 진찬을 열었다. 환영 잔치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수령의 첫 번째 진찬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밥과 국수는 각 한 그릇씩이다. 밥은 백미로 지은 백반과 팥물로 지은 홍반을 같이 차렸다. 백홍반이 기본이었다. 진주에서는 국수보다는 떡국을 올렸다.

국물 음식으로는 채소를 넣은 고깃국과 찌개다. 큰 접시에는 편육과 산적, 생선회가 각각이다. 술은 딱 한 잔이다. 신임 수령의 실수를 방지하려는 배려다. 고깃국은 등급이 있었다. 최고봉은 채소를 넣지 않고 고기만 끓인 맑은 ‘확’이다. 채소를 같이 넣어 끓이는 국은 갱(羹)이고 한약이나 제사에는 탕(湯)자를 쓴다.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문집인 ‘초사(楚辭)’에서 유래됐다.

진주의 고음국에 파를 넣지 않고 깔끔하게 소금간만 하는 것은 최고 등급인 확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진주에서 가장 비싼 생선은 민어와 도미였다. 농어나 도다리도 좋은 횟감이었다. 물 맑은 남강이 흐르는 진주에서는 민물회를 많이 먹었다. 잉어, 쏘가리는 남강과 하동 동정호에 많았다. 수령은 새벽에 갓 잡은 싱싱한 회로 여독을 풀었다. 회를 과식해 탈이 나면 같은 생선의 대가리 뼈를 끓여 탕을 올린다. 생선의 골뼈가 생선살을 소화시킨다는 ‘동의보감’의 해독법이다. 회를 소화하지 못할 때는 생강즙이고, 식중독에는 동아즙을 썼다.

나물이나 김치, 젓갈 등 젖은 음식은 작은 보시기에 4그릇을 담는다. 작은 접시 4개에는 과일, 두 가지 포, 그리고 떡이나 강정 같은 쌀가루 음식이다.

꽃상에 오르던 과일은 겨울에는 주로 감과 배였다. 대추와 밤도 차렸다. 여름철 가장 고급 과일은 역시 진주 수박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규례는 지켜지지 않았다. 궁중에서도, 민가에서도 사치가 만연했다. 음식이 곧 신분의 상징이었다. 특히 고종 대에는 유난히 궁중 잔치가 많았다. 잔치 한 번 치르는데 소요된 비용이 100만원, 당시 국가 예산의 7분의 1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1902년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진찬을 끝으로 고종은 강제로 퇴위되었고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