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85)아파트의 오후(이영춘)

2022-12-11     경남일보
아파트의 오후(이영춘)
 

 

오후의 긴 햇살이 고층 아파트 난간에 걸려 너울거린다

어디선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 우는 소리

이것이 사람 사는 모습인가 여기면서도

금세 쓸쓸해지는 나는

어느 귀 큰 사람의 자식이었던가



적막하다 아파트 숲은,

저 많은 창마다 밤이면 별을 삼킬 듯

등불이 켜지고

창문 한 번 신통히 열어보지 못한

내 삶은

지금 뉘 집 문밖의 등불로 흐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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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많고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은 세상에선 귀를 열어놓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당연한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후의 긴 햇살이 고층 난간에 걸린다거나 아득히 들리는 아이들 소리 같은 거 말이에요. 자연의 소리도 사람의 소리도 귀를 열지 않으면 들리지 않으니까요. 사람살이가 녹록지 않아서 모든 소리에 쓸쓸해지는 사람이 보이는군요. 그러하기에 어느 귀 큰 자식이고픈 사람은 우리의 자화상이겠어요. 적막한 아파트 숲은 창마다 불빛을 달고 수많은 별을 삼킬 듯하지만 정작 내 삶은 어디에도 밝힐 수 없는 어둠이어서 서글프네요. 그렇다고 불행할 건 없어요. 이리 담백하게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안다면 어떤 것에도 귀를 열어놓고 있을 테니 말이지요. 어둠에선 무엇보다 귀를 열어야 길을 잘 찾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어둠이어서, 혹은 주변이 온통 캄캄해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 모든 감각을 감아보기로 해요. 그리고 가만히 소리에 집중해 보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