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엄마의 김장 발표회

김미경 시선(sysun) 파트너즈·컨설턴트

2022-12-18     경남일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엄마는 연중 최고 행사인 김장을 위한 ‘준비 앓이’를 한다. 본격적인 김장에 앞서 준비 앓이부터 하는 이유는 오 남매의 일 년 양식을 장만해 주는 기분으로 김장을 대하기 때문이다.

김장 준비는 여름에 배추와 무 모종 옮겨심기부터 시작된다. 올여름처럼 가뭄이 심할 때는 수돗물을 끌어다 배추와 무밭에 물을 주고 길렀다. 가뭄이 길어진 탓에 밭이 쩍쩍 갈라지는 상태에서 마늘은 그나마 성공한 농산물 모양을 갖추어 처마 밑에 걸렸다.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면서 온돌방에 앉아서 몇 날을 이웃집 할머니와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하나하나 직접 마늘을 까셨다. 당신께서 재배할 수 없는 ‘청각’같은 양념은 직접 채취하러 나선 예도 있었다, 청각을 시장에서 구매하면 경제적인면에서 훨씬 이득이지만 당신 손으로 직접 뜯어서 넣고 싶어 하셨다.

이웃집에서 하나둘씩 김장한다는 소문이 도니 엄마의 마음도 바빠졌다. 분명히 주말에 자식들과 모여서 함께 하자고 약속했는데 동네 분들이 도와주신다고 하자 주중으로 일정을 변경해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 나는 투덜대면서도 급하게 몰캉몰캉한 호박 시루떡에, 구수한 돼지고기 수육과 무 덤벙덤벙 썰어 넣은 대구탕을 끓여서 이웃분들 대접하려고 준비해갔다.

엄마는 자식들은 돈벌이하느라 주중에 시간 내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만 김장하는 날 만큼은 싹 잊어버리고 날짜를 결정하신다. ‘누가 와서 김치통 들어 주고 잔심부름할 거냐’, ‘김치 담그는 날 오지 않는 사람은 김치 갖고 갈 생각하지 말아라’ , ‘각자 담아 가고 싶은 만큼 김치통 전부 챙겨서 오너라’ 이날만큼은 엄마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일 년 동안 젓갈부터 양념까지 당신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보니 작품 발표회 하는 기분인 듯하다. 김치 치대는 옆에 앉아서 배춧속 하나 쭉 찢어서 빨간 양념 발라 입에 쏙 넣어주실 때 무조건 ‘울 엄마 김치가 젤 맛있다’ ‘최고다’ 엄지 척하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올해도 엄마의 최고 연중행사가 무사히 끝났다. 오 남매가 각자 몫만큼 김치통을 담아 돌아오는 등 뒤에서 ‘김치냉장고에 바로 넣으면 맛없다. 하루 이틀 익혀서 거품 뽀글뽀글 올라오면 넣어야 맛있다’ 최후의 당부를 보태신다. 이 김치는 앞으로 일 년간 우리의 식탁에 올라올 것이다. 그때마다 엄마의 따뜻한 잔소리도 함께 오를 것이다. 주중도 좋고 잔소리도 좋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엄마의 김장 발표회가 계속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