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86)눈은 내린다(정윤천)

2022-12-25     경남일보
눈은 내린다(정윤천)
 

 



사랑하라고 눈은 내린다

사랑할 때 떨지 말라고 눈은 내린다



가난하라고 눈은 내린다

가난할 때 춥지 말라고 눈은 내린다



발목부터 더 가느다란 두 줄의 철로 위로

지구보다 더 커다란 기차가 지나갈 때

철커덕 철커덕 눈은 내린다



이 세상의

온갖 철커덕거림들을 싣고 가려는

멀어지는 기차의 지붕 위로

자꾸만 눈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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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산책……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고 거리가 흥성거리던 때가 있었어요. 눈이 오면 좋고 아니어도 좋은 그런 시절요. 사람이 가득하고 노래가 가득한, 그것만으로 충분한 행복이었죠. 지나간 시간에서 어떤 것이 돌아오고 어떤 것이 돌아오지 못할까요. 기억은 시작되는 곳에서 사라진다는 걸 참 많은 시간을 돌아 알게 되네요. 사라진 시간 속으로 기차가 지납니다. 온갖 철커덕거림을 싣고 멀어지는 기차를 봅니다. 눈이 내리는군요. 흑백영화의 장면같이 눈은 내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랑을 키우며 사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사랑은 쌓이고 가난은 덮어줄 만큼 눈은 가볍고 폭신합니다. 내리는 눈을 보며 이리 담담하게 말하는데 왜 가슴이 시릴까요. 현실이 냉혹할수록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꿈꿉니다. 북유럽 동화가 유독 아득한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호기심을 자극하고 무한한 상상을 펼칠 수 있는 북유럽 동화를 읽다 보면 그 속에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을 수 있죠. 눈은 그런 것 같아요. 보이면서 보이지 않은 시간이거나 영영 녹지 않을 이야기 같은 것요. “멀어지는 기차의 지붕 위로 자꾸만 내리는 눈”을 크리스마스 삽화로 얹어 보는 날입니다.